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사우스베일로 한의대 장학생 선발 수필 공모

 사우스베일로 한의대는 동양 의학의 치유에 관심 있는 예비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별 장학금 지급 공모전을 진행한다.   응모자는 ▶당신에게 침술 및 한약 등 한의학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당신은 왜 한의학을 공부하고 싶은가 ▶사우스베일로는 왜 당신에게 전액(100%) 장학금을 지급해야 하나 라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수필 형식으로 작성해 이메일로 제출하면 된다.   답변 분량은 제한이 없으나 설득력을 갖추고 있으며 논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작성돼야 한다. 응모자격은 인증된 대학에서 최소 60학점 또는 90학점(쿼터제)을 이수해 사우스베일로 한의대 최소 입학자격 요건을 갖고 있어야 한다. 현재 재학생이나 과거 자퇴 또는 퇴학 조처된 자는 제외된다.   공모전 1등 수상자는 사우스베일로 한의대에서 석사 학위 취득에 필요한 모든 교과 과정과 임상 실습에 들어가는 총 학비를 전액 장학금으로 제공한다. 2등에게는 석사 과정 총 학비의 40%를 장학금으로 지급하며, 3등은 총 학비의 20% 장학금 혜택을 받는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southbaylo.edu)에서 찾을 수 있다.   ▶문의: seonkim@southbaylo.edu, 션 김 담당자사우스베일 한의대 한의대 장학생 수필 공모 한의대 최소

2022-08-22

[6.25 수필 공모 입상작-우수상] "한국전쟁과 평화"

I come from a generation that has mostly forgotten the sacrifices made by its former to provide the liberties and securities which are often disregarded and taken for granted. This self-absorbed generation seems to be only concerned with video games, superficial entertainment, and instant gratification. But even though I am a child of this generation, I am also the grandchild of a Korean War veteran, and I have become increasingly fervent about the Cold War. This awareness is one that was passed on to me by my father. He used to take out his father's medals to teach me about the tragic event and how honorable a person my grandfather was. Although my grandfather fought for the freedom of his country, he was always uncomfortable about showing pride about the war. Rather, my grandfather would shout, silently put away his "achievements," and say, "Anything that was earned from killing our own brothers is not honorable." Although I knew that any war is too cruel to talk about, at that time, no logic could be seen in my grandfather's reaction to my father, yet. A section in my U.S. history class triggered me to take the Korean War more seriously. I was uncomfortable with the fact that the Korean War was merely regarded as a conflict, not a civil war. Unhappy with the current treatment toward the war in my textbook, I decided to bring greater awareness of the war, honoring the sixtieth anniversary of the Korean War. Therefore, I organized a photo exhibit about Korean War veterans to honor the veterans, in which I interviewed five veterans to talk with them about Korea then and today, and to vividly sketch the impressions of the battlefield. I captured the confident eyes of the old soldiers and their pictures taken back when they were in Korea, fighting for freedom. The exhibit offered an alternative perspective about Korean War. Preparing for the exhibit, I came to understand the war at the veterans' level and felt the need of minimize the generational apathy toward such a tragic event. While setting up the exhibit, I got involved with the 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 Impressed by such determination, board members of the organizing unanimously elected me as their key-note speaker for the appreciation event. The day I gave the speech is one that I will never forget. Standing nervously at the front of the convention hall at The Orleans Hotel in Las Vegas, clutching the copy of my speech with trembling fingers, I stared into the eyes of more than five thousand Korean War veterans and their families. "It is very easy to forget, but forgetting can be reversed, so that the proper respect is given." I assured them that their sacrifices will always be remembered, and that there are those-such as myself-who will continue to make efforts to raise awareness of the price our fore fathers paid for our freedoms. From the podium, I could see the fading eyes of the forgotten men in the convention room. Eyes of the veterans were tired from aging. Yet they were shining with the pride of what they fought for and secured. As I stepped down from the podium, applause erupted throughout the hall. This experience has allowed me to see the war through my grandfather's eyes. Medals are merely reminiscence of the days of hunger, blood and trauma to my grandfather. No matter what the veterans initially fought for, the war was just a massive massacre of our own brothers, and this sometimes made my grandfather feel extremely guilty, though he had no choice but to do so. My involvement in the Korean War 60th anniversary appreciation event taught me that if we are to start a world relationship, it must be based on respect for each other and each other's differences, sacrifices, and values. In the pursuit of deeper understanding in the global relationship, I hope to build ties among nations and minimize shallow perspectives about global issues. Seeking a deeper understanding about the past, present and the future, I hope to avert future conflicts and wars.

2011-07-18

[6·25 수필 공모 입상작-가작] 18명의 목숨을 살리다

6·25가 가까워 온다. 61년 전 그날 새벽 요란한 비상소집 사이렌 소리에 새벽잠을 깼다. 본능적으로 머리맡의 전투복을 챙겨입고 모자를 썼다. 알람시계가 4시 45분을 가리키고 있다. 전투화를 신고 권총을 뽑아든 채 본서로 향해 달렸다. 멀리서 기관총 소리가 들려 온다. 간간히 포소리가 섞인다. 종전에는 없던 소리…. 전면전의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드디어 본서 앞 광장에 도착했다. 새벽을 뚫고 달려온 비번 서원들이 신속하게 소대편성 중이다. 말을 몰고 달려온 서장을 중심으로 간부회의가 열렸다. 통신주임이 본국(경기도 경찰국)에서 받은 무전내용을 전달했다. 경기도 관내 38선 경찰서 전체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서쪽부터 옹진 청단 연안 이곳 백천 그리고 특히 개성은 탱크가 앞장섰다고 했다. 소집에 달려올 때 들리던 포소리의 정체가 밝혀졌다. 내가 경창전문학교(현 경찰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임관돼서 처음 부임하던 1년 전부터 한 주일이 멀다하고 일어났던 38선 충돌사건에서는 포소리가 없었다. 포소리가 들리고 탱크가 앞장섰다는 소리에 남침이란 확신이 섰다. 이어 일선 지서도 탄약이 떨어져 고전 중이란 전화가 왔다. 곧 이어 서장 명령으로 일신 지서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백천 서원 400여명 중 반 수 200여명이 4개 일선 지서에 50명씩 배치되어 교대로 38선을 지키고 있었다. 가진 무기로는 일본군이 두고 간 38식 단발 장총에 탄약 30발…. 드디어 본국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각 서는 서장 지휘 하에 병력을 수습하고 문서를 소각하고 서장 재량으로 유치자들을 처리하고 신속히 인천의 경기도 경찰국 앞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이다. 서장은 경무 사찰 보안 통신주임과 더불어 남은 전체 서원과 가족을 데리고 트럭으로 벽란도(강화도 맞은편 포구)로 떠나고 경기 주임은 정예부대를 조직 본서 앞 남산에 진을 치고 적의 진격을 막아 지연 전술로 직원들 후퇴를 돕기로 했다. 서장이 떠날 때 유치장은 수사주임 책임이니 알아서 유치자들을 처리하고 인천에서 만나자고 했다. 경비주임이 내게 경험 많은 직원 8명과 실탄 8발씩을 나눠줬다. 트럭으로 직원과 가족들이 떠나고 남산의 경비 주임 소대도 떠났을 때 유치장에 들어섰다. 그 때 시간 오후 1시 반 폭풍전야 같은 적막이 있었다. 잡범들은 이미 석방이 됐고 보안법을 위반한 사람만 18명 새삼 서장이 마지막으로 한 말 "유치자를 처리하라"던 말이 떠올랐다. 멀지않은 곳에 적군이 몰려오고 있는 절박한 순간. 적과 한 통속인 유치자들을 처리하라는 말은 없애라는 말이다. 경비주임이 챙겨준 직원과 탄약은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하다. 직원들이 철사로 두명 씩 팔목을 묶은 아홉쌍을 서 앞으로 끌어냈다. 번민의 시간이 흘렀다. 18명의 목숨을 나에게 맡긴 서장이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책임을 통감하는 순간이 흐르고 결론을 얻었다. '살리자! 사상이 뭔데? 사상 때문에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27세의 내가 겪은 경험과 믿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갈 길을 선택하도록 하자.'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하고 싶은 말이 정리됐다. 유치자 18명을 모두 그늘에 앉히고 묶인 철선을 끊었다. 순간 창백했던 18명 얼굴에 혈색이 돌고 말 못할 감동이 흘렀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부터 자유입니다." 첫마디 말에 "아이구 고맙습니다 주임님!" 하며 모두 목이 메었다. "제 나이는 지금 27세 왜정 때는 좌익 책도 읽고 해방 후에는 직접 공산주의를 보기 위해 고향 옹진에서 38선 이북이 된 해주를 10여 차례 가 보고 내린 결론이 남북은 외국 세력의 점령지요 살기 위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딱꿍총보다는 M1 마차보다는 GMC가 종당에는 이길 것이라 믿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코 앞의 적이 우세해 보이지만 길게 보면 GMC가 이길 것으로 믿습니다." 이 때 혹시나 아들을 만날까 서 근처에서 서성이던 노부부가 풀려난 아들을 보고 얼싸 안았다. 내 말이 계속됐다. "자 이제 우리는 막차 GMC로 떠나려 합니다. 함께 갈 사람은 타시오. 저와 운명을 같이 할 사람은 갑시다." 나의 말이 끝나자 놀랍게도 부모를 만난 두 사람만 남고 나머지 16명은 모두 트럭에 올라탔다.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를 태운 최후의 GMC 트럭은 적군의 포소리가 무척 가까워진 와중에 벽란도를 향해 쉼없이 내달렸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종종 그때 그들의 안부를 생각한다. 함께 남하한 대부분 젊은이들은 군에 자원 입대했다. 아마 지금 살아있다면 모두 80~90세가 되었을 것이다. 어느 곳에 있든지 선택한 자유를 누리며 사시길 간절히 바란다. 해마다 6.25가 되면 느끼는 추억이다.

2011-07-18

[6·25 수필 공모 입상작-가작] 병실에서 만난 미국 노병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날도 노을 빛이 이리도 붉게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왔었는데. 12년 전 그 날은 몹시 바쁜 날이었다. 보통 때면 벌써 집에 갔어야 할 시간인데 환자 하나가 롱비치에 있는 재향군인병원으로부터 이송되어 와서 다음 날 스케줄이 첫번 째인 수술을 위해 저녁에 투석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심장으로 피를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세개나 막혀 있다고 했다. 나는 준비를 하여 그가 있는 병실로 가서 치료를 시작했다. 긴 하루를 보내고 피곤한 눈으로 바라 본 창을 통해 들어오던 저녁 노을 시시각각으로 빛을 잃어가며 더욱 짙게 변해가는 바로 그 빛이 화살이 되어 내 마음을 파고 들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기는 하나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수술을 앞둔 마음의 어수선함이 느껴질 것도 같아 이름을 부르니 눈을 뜨고 무슨 일인가 바라보았다. 하지만 착잡한 것인지 아니면 포기를 한 것인지 얼굴 표정이 읽혀지지 않았다. 그에게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상황이 아우르는 딱히 꼬집어 낼 수없는 무언가에 눌린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기분을 걷어내려고 저녁 하늘 노을이 아름다우니 한 번 바라보라고 하며 약간은 호들갑스럽게 이야기를 시키면서 가족에 대해 물었다. 한 번 이혼했고 지금은 걸 프렌드와 살고 있다고 했다. 걸 프렌드가 아메리칸 인디언 스타일을 좋아해서 모든 것을 다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그는 '아이 돈 케어'라고 했다 . 자식이 있었으나 몇이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다음 그가 들려준 이야기로 해서 그 숫자는 기억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60을 넘긴지 네 다섯 해나 더 지났을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말투는 침착하였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페이소스는 무엇 때문일까 궁금했는데 문득 그가 내게 물었다. 한국 사람인가하고. 그렇다고 하자 첫 눈에 알아보았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필리핀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들이 워낙 병원에 많기도 하고 또한 내 얼굴 색이 검은 편이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첫 번에 알아 보았느냐고 하니 1951년에 한국에 갔었다고 했다. 그 때 그의 나이 겨우 17살. 고등 학교를 바로 졸업한 뒤 한국전에 투입된 것이었다. 미국도 그 때는 징집제여서 한국처럼 누구나 군대에 가야 했다고 했다. 어떤 마을은 같은 연배의 남자들이 모두 다 징집되었다고도 했다. 해병대로 들어간 그는 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총쏘는 법과 다루는 법을 익혔을 정도로 전쟁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소년이었다. 배 안에는 비슷한 또래의 소년들이 제법 있어 한국으로 가는 동안 장난도 치고 놀았다고 했다. 당시 한국은 오지였고 서방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였다. 내가 일본 위에 있다고 말하자 그는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라 이름은 들었지만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한국은 그 즈음 부산까지 쫓겨 내려가 거의 북한이 차지할 순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다시 북으로 치고 올라가 압록강(그는 the Yaru라 했다)까지 이르렀는데 그 무렵 그는 전쟁에 합류했다고 했다. 그가 한국이란 나라에서 처음 부딪친 것은 상상도 못할 추위였다. 영하 20~30도나 되는 추위로 온 몸이 그냥 냉동이 되어 막대기처럼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고 했다. 그 소리가 하도 이상해서 생각마저 얼어붙었는데 그 소리와 함께 허연 누비 옷에 모자를 쓰고 싸울 것 하나 지니지 않은 그 동안 만났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에는 그냥 밀려 왔다고 했다. 인해전술의 중공군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들이 나중에는 진절머리가 나기까지 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부대간 서로 연락이 되지 않아 후퇴 명령이 전달되지 않은 20여 명이 중공군에게 잡혔다. 그들은 포로들을 북으로 북으로 끌고 갔는데 그들의 말소리도 피리소리처럼 어지러웠다고 했다. 끌려가는 어느 순간 정신이 퍼뜩 들면서 두려움이 몰려왔다고 했다. "I was only seventeen then. I didn't know any better." 그는 이 말을 하고 나서 다시 눈을 감았다. 눈 감은 그를 바라보면서 만약 내가 그 나이였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지레 놀라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 나이 또래의 정신대로 나갔던 열 예닐곱 소녀들 정말 남자라고는 알지 못하던 소녀들이 이역 만리에서 어떻게 버텨냈을까.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나는 미국에 멀쩡하게 와서도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속에서 일어나는 오만가지 생각들 때문에 나 스스로를 얼마나 볶았는데 하며 혼자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들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 자꾸 중국 안 쪽으로 들어가는 건 알겠는데 도무지 어디가 어딘 줄 몰라 속이 탔다고 했다. 더구나 말을 알아 듣지 못하니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감도 못잡고 무서웠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슬슬 무리에서 떨어지면서 도망을 쳤다고 했다. 어딘 줄도 모르고 그저 동물적 감각을 이용해 달렸는데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오금이 저리고 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달리 아무 대책도 없으니까 달리고 또 달리기만 했는데 배고픈 줄도 몰랐다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후에 둘러보니 농가 마을이 보이기에 조금만 쉬었다 가려고 한 길가 집 헛간으로 숨어들었다. 늦은 밤이어서 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아 누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밖에서 '따따따' 말 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그러면서 헛간으로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데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이 잡혔구나' 싶어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엄습했다고 했다. 말도 통하지 않으니 설명할 도리도 없고 온 천지에 도움이 올 구멍은 하나도 없이 외딴 헛간에서 얼어붙은 그의 눈에 농기구가 눈에 띄었다. 그러는 동안 삐걱 문이 열리며 남자 하나가 들어섰다. 그저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그 남자를 향해 정신없이 낫을 휘둘렀다. 아무 생각없이 자기 집 헛간에 볼 일이 있어 왔던 남자는 '윽' 소리 지를 겨를도 없이 쓰러져 버렸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순간 그는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그 자리에 붙박혀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러자 다시 밖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며 또 이쪽으로 언성을 높이며 오는게 아닌가. 자기가 한 짓이 어떤 것인지 안 그는 더 무서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살아야겠다는 본능만이 그를 사나운 짐승으로 만들어 헛간으로 들어오는 그 여자를 향해서도 생존의 무기를 휘둘렀다. 여자가 또 그렇게 쓰러지고 난 뒤 피로 범벅이 된 자기 손을 보며 그는 짐승같은 울음을 울었다고했다. 어찌해야 하나 어찌할까 막막해서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하는 그의 눈 앞에 'Oh No!'. 이제 갓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말까하는 계집애 하나가 중국말로 뭐라뭐라 하며 울려고 하는 게 아닌가! 아마 엄마를 뒤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바깥 사정을 아무 것도 모르는 그에게 든 생각은 만약 이 아이가 울어버리면….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비치는 눈물을 나는 보았다. 병상의 그는 17살 그때로 돌아가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내가 혼자 듣고 흘리기엔 너무도 벅찬 이야기였다. 그 때 죽은 사람들에게도 지금의 그에게도 너무나 안된 일이었다. 그는 분명 엄청난 일을 저질렀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나는 저 17살 소년에게도 지금 수술을 앞둔 예순 네 다섯의 노인에게도 위로의 말 한 마디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만약에 신부님이라면 지금 그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을까? 그가 내 대답을 원해서 이야기를 하였던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난 뒤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하나 느낀 것은 사람의 목숨은 우리 판단의 잣대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어요. 모두가 정확한 의학적 지식을 토대로 어떤 사람의 끝을 말하는데도 살아 남는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은 각각 자기가 갈 때에 가는 것이구나 다만 가는 방법이 다를 뿐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됐지요." 이말을 들려주면서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가 조금이라도 위로 받기를 바랐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처음의 그 담담함으로 입을 열었다. "Why me?" 나는 나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그들 삶의 종결자이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일로 평생을 고통 받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지금이 처음입니다." 아 이 사람은 왜 이 말을 내게 하는 것인가? 가톨릭 신자인 그는 그 수많은 고해 성사의 시간을 어떻게 참았을까. 만약 그 사실을 고백했었다면 하고 나서 더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지금 나에게? 나는 그에게 길에서 만난 한 사람의 나그네로 마침 한국 사람이어서 그리고 그는 생사를 가르는 큰 수술을 앞두고 마음이 허락되어 속에 감추어 두었던 비밀 이야기를 하고 마음 가볍게 남은 길을 가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어차피 수술 후 롱비치의 재향군인 병원으로 다시 갈테니 말이다. 그러는 동안 치료 시간이 끝나 나는 그에게 수술이 잘되기를 빌어 주었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위해 그 어린 나이의 소년은 싸웠고 그 일로 해서 그는 얼마나 큰 고통을 겪으며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았던가. 그 방을 나오면서 우리는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모르는 채 너무 당연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나갔다.

2011-07-18

[6·25 수필 공모 입상작-우수상] 삶과 죽음을 가른 유격대원

줄에 매달린 원 그림 타겟이 줄지어 왔다 갔다 한다. 그 타겟 과녁은 초보의 총구에도 명중돼 뻥 뚫린다. 연속 뚫리는 타겟! 사격연습장 안 풍경이다. 세상에 그런 유형의 전쟁이 있을까 만은 군번 없는 우리 유격대원들의 영덕 상륙전이 그랬다. 다른 동작을 할 수 없는 줄 건너기에서 생사가 갈린 운명 그리고 처형되기 직전 적군으로부터의 반전회생을 어찌 봐야 할까. 급조 사조직이나 다름없는 부대가 부산 제4부두에서 상륙용 함정 LST를 타고 전지 영덕을 향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우리들 팔백여 학도병. "유격대는 적의 후방을 기습 아군을 돕는 것이 주 임무인 특수 부대다." 귀가 솔깃하게 들렸던 모병관의 그 말을 떠올렸다. 모두들 지치고 긴장해있었지만 기상은 뜨거웠다. 배낭을 베고 옆에 누워있던 남진태가 내게 다가왔다. "형 우리 중 누가 먼저 집에 가든지 부모에게 소식을 전해주기로 합시다." 제법 심각한 표정에 나는 되도록 태연스럽게 "알았어"라고 했지만 나 역시 마음이 착잡했다. 그의 이름은 내 평생 따라 다닐 듯하다. 그는 학교 연극반 후배로 또 밴드부에서 나는 트럼펫을 그는 클라리넷을 불었다. 한 동네 살았다는 것외에 취미도 비슷해서 함께 어울린 시간이 많았다. 그가 유격대를 택한 것도 나와 함께 하겠다는 일념에서 일 게다. 그는 경찰서장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를 닮아 미남형 얼굴이었다. 그는 매년 개교기념일에 열리는 문예작품 공모에서 당선 된 시 '물안개 언저리'로 나는 콩트 '산골 편지'를 발표하면서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는 베니 굿맨 같이 한국에 스윙재즈 보급 꿈을 가졌었다. 막 잠이 든 순간 LST 엔진의 가파른 역회전 소리와 선실 곳곳에서 붉은 비상등이 번쩍거렸다. 삑삑 버저소리도 울려댔다. 확성기에선 "전 장병 상륙준비" "전 장병 상륙 준비" 소리가 계속 나왔다. 탄창을 장전한 우리들은 초조와 긴장 속에 삼십분 넘게 기다렸지만 다음 명령은 없었다. 확성기에선 군가만 계속 나왔다. 한 시간은 족히 되었는데도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모두들 초조하고 불안한 빛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명의 미군 고문관만 급히 서두는 모습이 심상치 않는 일이 생긴 듯 했다. D데이 동트기 전 상륙해야 하는 시간을 놓쳤다. 날이 밝아 적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때 LST 배 앞바닥과 그 옆 문이 열렸다. "제1소대부터 상륙개시" 하고 중대장이 명령을 내렸지만 누구 하나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파도가 배 갑판 높이까지 부딪쳤다. 배안에도 물이 들어와 어떻게 상륙할지 망설일 때 미 고문관이 배에 연결된 밧줄을 가리켰다. 언제 누가 연결했는지 가파른 바위 옆 소나무에 매인 밧줄이 보였다. 바람과 높은 파도는 훈련과 실전경험이 없는 대원들을 두려움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선임하사와 함께 제1진이 밧줄에 매달려 한 팔 한 팔 전진했다. 뒤에서 보는 우리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백사장에 닿자 절벽 아래로 급히 몸을 숨긴 이십여 명 장병들은 제2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제2진은 갑자기 밀려온 파도에 두 명이 잡은 밧줄에서 떨어져 바다에 휩쓸렸다.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비탈진 산위의 적군들 사격이 상륙하는 병사들에게 집중돼 삼 사명이 한꺼번에 물속에 떨어졌다. 배 앞에 붉은 핏물이 보이자 제3진은 겁에 질려 누구도 선뜻 나서려하지 않았다. 미 고문관이 권총을 빼들고 "컴온 컴온" 위협하면서 독려했다. 남진태는 내게 바짝 다가와 "형 함께 가요"하면서 내 뒤에 섰다. 그는 제5진이었는데 재빨리 누구와 바꾼 모양이었다. 후진(後陣)일수록 안전하단 보장은 없지만 어쩐지 그가 남의 운명을 대신 지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그래도 잘했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3진 출발은 타겟처럼 완전 노출된 상태라서 콩 볶듯 쏘아대는 적탄에 이십 명 중 절반이 상륙하고 절반은 행방불명됐다. 남진태를 본 것은 "형" 하는 비명소리에 돌아 봤을 때 이마에 피를 흘리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무슨 말을 하려하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제3진의 엄청난 희생에 밧줄을 끊고 LST 문을 닫았다. 조금 물러가는가 싶더니 속력을 내어 백사장으로 돌진했다. 뱃머리가 백사장에 쑥 올라갔지만 문은 열지 않았다. 삼사 분이 지나자 미군 쌕쌕이 편대가 날아와 언덕 위 솔밭을 불바다로 만들고 지축을 흔드는 폭격에 귀청이 떨렸다. 전투기가 떠나자 배문을 열고 전 병력을 상륙시켰다. 공습에 힘입어 상륙에는 성공했지만 보급품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적 5사단과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투에서 수백 명이 전사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영덕 남단 장사리 양동작전이었다. 얼마쯤의 희생을 예견하고 우리 부대 학도병 유격대를 투입한 것 같았다. 내가 포로가 된 것은 전날 밤 기습을 받은 전투에서 본진을 놓친 우리 소대가 산골 초등학교 분교에 들어가 잠을 자던 때였다. 새벽녘 후퇴하는 적 패잔병들에게 잡혀 험준한 태백산을 타고 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우리 유격대원 이십팔 명 외 안강전투에서 붙잡힌 이십 명이 대오를 이뤄 밤 낮 이틀을 걸었다. 오대산 초입부터 포로병 숫자가 점점 줄기 시작했다. 가까운 골짜기에서 여러 발의 총소리가 났음에도 적들의 무표정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 포로는 두 감시병에 이끌려 다른 방향 길로 접어들자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질 조짐에 목안이 바싹 탔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다짐을 수없이 했다. 그 때 귀공자 같이 생긴 감시병이 내게 다가오더니 "공포를 열 발 정도 쏠 테니 빨리 달아나라"고 했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와 나는 마음이 좀 통한 편이었을까. 내가 대구 출신 학도병임을 안 그도 대구출신으로 서울대 재학 중 의용군이 된 조현수라고 했다. 자기가 살아서 돌아가면 삼덕동에 살고 있는 부모에게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과 포항 안강전투에서 전 사단이 퇴각하면서 북으로 갔다는 것을 꼭 전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수성중학교장이고 삼덕교회 장로라고도 했다. 대여섯 발의 총성과 동시에 우리들은 무작정 사방으로 뛰었다. 연이은 총성을 뒤로하고 뛰고 또 뛰었다. 총성은 산 메아리가 되어 수백 발을 쏜 것처럼 온 골짜기를 울렸다. 다섯 명 포로 중 다른 한명과 나는 이틀 동안 요기라고는 빈집에서 생고구마 두 개를 먹은 것이 전부였다. 긴장한 탓에 허기진 줄도 몰랐다. 춘천을 거쳐 의암호와 소양강 쪽에 있는 임시수용소를 찾아 신고를 했다. 나는 군번이 없는 유격대라 확인이 늦어 부대복귀도 늦었다. 아침 일찍 막사 밖을 나오면 소양강과 의암호에 물안개가 자욱이 덮쳐오곤 했다. 나를 따랐던 남진태의 시 '물안개 언저리'가 오대독자인 그의 장래를 암시한 것 같았다. 공포를 쏴 나를 도망치게 했던 적 의용군 조현수와 숨 막혔던 일도 떠올랐다. 나는 그들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셈이다. 하기야 조현수 집에는 사실대로 말하면 되겠지만 문제는 남진태 집이다. 내가 그의 집을 찾은 것은 귀가한 지 나흘째 날이다. 그가 영덕 전투에서 행방불명됐다는 통지를 받은 지 한 달 반 만이었다. "누구세요"하는 그의 여동생 목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눈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내게 마지막 말을 하려하던 바로 그의 눈과 꼭 같았기 때문이다. 황급히 달려온 그의 아버지와 두 모녀가 내 입만 쳐다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가 나를 따라 제3진에 합류한 장면을 지우고 백사장 전투 후 보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확신에 찬 말로 위로했다. 아버지는 이슬 맺힌 눈을 돌리면서 묻는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디서 들었는지 해변에 학병들의 모자와 허리띠가 수없이 나뒹굴었다는 말을 한 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배웅하던 여동생이 내게 다가서더니 심중에 있는 말을 했다. "오빠 숨긴 거 있지 다 알아 그렇지만 나도 오빠같이 연극 같은 인생을 살아갈 거야." 그것이 그녀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다. 전리도 승패도 불명한 전쟁. 나 때문에 죽은 사람과 나를 살린 적군도 있어 혼돈스런 그 전쟁. 결국 일으킨 쪽과 막아낸 쪽 모두 한 맺힌 피해만 입지 않았나. 그뿐이랴. 죽은 자와 산자로 가른 그 무엇이 지금도 내 가슴을 끓인다. 그 때처럼 가쁜 숨을 넘긴다.

2011-07-18

[6·25 수필 공모 입상작-가작] "남한 사람이야, 북한 사람이야"

학생인 내가 학교에서 미국인 친구들을 처음 만날 때 흔히 듣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질문이고 거기에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면 농담처럼 남한이냐 북한이냐고 묻는다. 한국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기 때문에 그냥 웃으며 넘기지만 가끔은 우리나라가 분단 국가이기 때문에 이런 농담을 듣는구나 싶어 서글퍼질 때도 있다. 나는 한국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도 한국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에게도 벌써 오래 전 이야기가 되었지만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매 학기 으레 학교에서는 '반공 글짓기 대회'가 열렸었고 단체로 반공 이념에 대한 만화 영화나 이승복 어린이에 대한 반공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그 때는 내가 어렸기 때문에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만화 속에서 녹색 옷을 입은 돼지가 동물 농장에 있는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 불합리하게 대하던 모습 그리고 아무 잘못도 없이 단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이승복 어린이를 처참하게 죽였던 공산당에 대한 이미지는 나에게 있어 막연히 공포의 대상 그리고 절대 없어져야 할 존재 정도로 여겨졌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있어 조부모가 있는 친구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놀러간다는 친구 또 할머니에게 용돈을 받았다며 자랑하는 친구들을 보면 나는 왜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 계실까 부러워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나중에 부모님께 들은 나의 조부모 이야기는 한참동안 나를 슬프게 했던 기억이 난다. 오래 된 흑백 사진으로만 보았던 나의 할아버지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에 의한 인민재판에서 지주라는 이유만으로 죽창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후 할머니도 6개월이 채 못 되어 한을 가슴에 안고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또 일곱 형제 중 제일 큰 아버지도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하게 자라던 남은 육남매는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었고 말할 것도 없이 생존을 위해 무던히 고생해야만 했었다고 한다. 꽤나 공부도 잘 하고 꿈도 많던 큰 고모님은 당시 겨우 여섯 살도 채 안 된 나의 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보느라 당신의 꿈도 접어두어야만 했었다고 하셨다. 잠시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고아원에서 지내면서 말로만 듣던 보릿고개를 죽을 힘을 다해 넘겨야만 했던 이야기 또 어린 나이였지만 살아야 했기에 방직 공장에서 일해야 했던 고모의 이야기.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들이 단지 한국전쟁이라는 슬픈 한국사가 일어난 시대에 살았다는 이유로 겪어야만 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나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만약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나의 조부모님과 부모님 형제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 요즈음 한국에 계신 우리 부모님께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아버지는 틈틈이 아버지가 어렸을 때 사셨던 생가에 찾아가 대추나무며 밤 나무를 가꾸시며 시간을 보내고 오시곤 한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지만 깨끗이 보존될 수 있도록 청소도 가끔 하고 오신다고 한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를 데리고 그 집에 가셔서 '여기가 아빠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이야'라며 보여주셨었던 집은 이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시골집이다. 아직도 가끔 부모님과 통화할 때 그 집에 있는 나무들을 가꾸고 계신다고 감도 한 바구니 따왔다는 아버지 말에 괜히 뭐하러 힘들게 그랬냐고 타박을 해 보기도 하지만 사실 나도 조금은 아버지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나에게도 어렸을 때 살던 집이 생각나고 그립듯 아버지도 당신이 어렸을 때 행복했던 그 집에서의 기억을 붙잡고 싶으신 것이었으리라. 이제 어디에서도 멸공을 외치는 사람은 없다. 흔히 TV 에서 상영하던 반공 이념을 담은 만화 영화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한국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상흔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굶어 죽느니 차라리 탈출해서 목숨이라도 연명해 보겠다는 북한의 꽃제비들 이야기며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주민들은 나몰라라 하면서도 항상 전쟁 준비에는 열을 올리고 툭하면 핵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북한 정권 지도층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같은 한민족이기 때문이다. 하루 빨리 남북 통일이 되고 내 부모님 세대나 그 윗 세대 어르신들에게는 아직도 살아 있는 역사의 상처들이 아물게 될 날이 오기를 바란다.

2011-07-18

[6·25 수필 공모 입상작-최우수상] 지금도 뻐꾸기는 울고 있을까

"지금도 뻐꾸기는 울고 있을까." 나무들이 녹색으로 짙어가는 6월이 오면 '높은별' 뒷산에서 울던 뻐꾸기가 생각난다. 61년 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6.25전쟁 이야기를 너희들에게 들여주고 싶구나. 할머니가 9살 초등학교 3학년때였다. 우리 손주 지원이 보다 한 살 더 어렸을 때였지. 할머니는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단다. 맑은 금강이 흐르는 마을이었어. 낚시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강가의 예쁜 조약돌을 줍곤 했지. 여름이면 노란 참외와 수박 복숭아가 가을이면 포도가 달게 익어가던 과수원이 많던 마을은 흰구름이 한가로이 떠나니던 하늘 아래 평화스러운 곳이었다. 6월 어느 날 밤 빨리 일어나라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깨어보니 보따리 짐들이 보였고 무섭고 불안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었다. 아직도 밖은 깜깜한 데 한 살된 여동생을 업은 어머니와 함께 4살 된 남동생과 나는 피란길을 떠났단다. 서울에서 점점 내려오는 대포소리가 정말 무서웠단다. 업고 이고 들고 길을 나선 어머니를 따라 동생과 나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길을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었지. 돌부리에 넘어지고 나뭇가지에 찔려 피가 나도 아픈 것도 잊은 채 엄마만 따라 가야했다. 아침이 밝아오자 터널에 모여든 많은 동네 사람들을 만났다. 어떤 사람은 꼭 가져와야할 보따리 대신에 요강을 들고 나와 웃었던 기억도 있다. 너희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너무 무서우면 그럴 수 있단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우리는 '높은별'로 향하는 40리 산길을 하루 종일 걸어서 올라갔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길에 엎드리고 나무 밑에 숨었지. 다리가 아파 더 이상 못 걷겠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높은 산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높은별'이었고 지형상 비행기 폭격이 불가능한 곳이라 거기로 피란을 갔었단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미리 그곳에 먹을 양식과 거처할 곳을 준비해 놓으시고 부산으로 떠나셨었다. 우리가 있던 방은 시골 싸리문 옆 소 외양간에 달린 흙방이었다. 문을 열면 소가 여물을 먹는 소리와 숨 쉬는 소리가 왜 그리 무섭게 들리던지. 낮이면 북한 인민군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내려온다고 해서 뒷산에서 지냈단다. 머루와 산딸기를 따먹고 땔감나무를 주우러 내려오곤 했지. 한여름 녹음이 짙어가고 호두나무에서 매미가 울고 한낮의 햇볕이 시골 마당에 쏟아지는 6월 산속의 나무 밑에서 우리는 '아버지는 언제 오실까? 언제 우리집에 갈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지. 높고 깊은 산속에서 뻐꾹뻐꾹 뻐꾸기 우는 소리가 메아리되어 들려오곤 했단다. 어느 날이었지. 부상당한 군인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 우리 마을에 들어왔었다. 키도 크고 코도 크고 눈도 파랗고 그중에는 흑인들도 있었다. 우리들은 외국사람을 처음 보아서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었다. 붕대로 머리를 싸맨 사람 다리를 다쳐 혼자 못 걷는 사람 총에 맞아 치료도 못하고 쓰러질 듯 지쳐있는 낯선 군인들이었지. 동네 이장 할아버지는 우리나라를 도와주러 미국에서 온 군인들이라며 무서워 하지 말고 빨리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했지. 보리밥과 김치 장아찌 같은 한국의 시골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집집마다 밀가루를 가져오게 하여 소다를 넣어 빵을 만들어 참기름에 찍어먹게 했었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멀고도 작은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가 희생되었는지 생각하자. 그리고 감사하자. 이제 가장 무서웠던 기억을 이야기 해야겠다. 심천 우리집에 필요한 것을 가지러 내려갔던 날이었다. 마을엔 북한 인민군들이 따발총을 들고 다녔고 학교와 교회는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옷과 모자의 빨간색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였는지 그날 하루종일 B29라는 비행기가 쉬지않고 폭격을 했었다. 비가 오듯 쏟아지는 폭탄에 마을은 불타 잿더미만 남았고 대문 옆 감나무는 까맣게 탄 채로 서 있었다. 비행기가 뜰 때마다 우리는 엎드리고 숨고 뛰었다. 죽은 엄마 곁에서 울고 있던 어린아이는 다리가 잘려 일어서질 못하고 피투성이로 살려달라 손짓하던 사람이 무서워 떨고 있었지. 나는 엄마손을 놓칠까봐 뛰어야만 했고 비행기 소리가 나면 나무처럼 보이기 위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해가 지고 밤이되어 산밑에 있는 집으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죽을 끓여 나누어 먹고 있는데 불빛을 보고 폭격을 한 것이었다. 집 뒤쪽 장독대가 있던 곳에 숨었는데 폭탄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가 하늘로 붕 떠올랐다. 지붕 위로 파편들이 불꽃 떨어지듯 쏟아 내리는 것을 보며 땅에 떨어지는 순간 머리 위 고추장 단지도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내 머리위를 덮쳤단다. 어머니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더듬거리는데 머리는 단지고 몸은 나였단다. 너희들은 그 장면을 생각하며 재밌다고 웃겠지만 9살이던 할머니는 얼마나 무섭고 아팠겠느냐. 고추장 범벅이 된 나를 데리고 어머니는 산밑 동굴쪽으로 뛰셨고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울 수조차 없었단다. 산속에 굴을 파고 방공호라고 했지. 비행기 소리가 나면 굴안에 숨고 입구는 나뭇가지로 막아 놓았단다. 북한 괴뢰군들은 남자들 심지어 총을 쏘지 못하는 학생들까지도 다 잡아갔단다. 그래서 아버지도 부산으로 내려 가셨지. 여름이 지나고 가을 추석도 지나고 겨울이 왔는데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아버지도 오시지 않았다. 우리나라 남쪽에 있는 부산으로 가기위해 어렵게 피란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지금은 KTX로 서울서 부산까지 3시간이면 편안히 갈 수 있는데 대전에서 탄 열차는 옆도 지붕도 없는 바닥만 있는 곳에 전쟁에 필요한 탱크와 지프차를 부산으로 운반하는 기차였지. 나와 동생들은 탱크사이에 이불을 쓰고 비가오면 맞아야하고 눈이 내리면 소복이 내린 하얀 눈을 덮고 자야만 했었어. 꽁꽁 언 주먹밥을 먹었다면 너희들은 믿을 수 있겠니. 나중에는 쌀을 조금씩 씹으면서 물대신 눈을 녹여 먹었던 피란 열차. 그해에 왜 그리 눈이 많이 내렸을까? 우리 옆에 있던 가족 중 한 아이는 아침이 되어보니 죽어 있었단다. 또 다른 화물칸 꼭대기에 매달려오던 사람들 중에서 터널을 통과할 때 부딪쳐 떨어져 죽었다. 아침이 되면 아들이 떨어졌다고 엄마가 없어졌다고 사방에서 울는 소리가 들렸다. 한숨 쉬고 슬퍼할 시간이 없이 3일 간을 피란 열차에서 지내고 4일째 되는 날 밤 부산에 도착했었다. 수많은 피란민이 쏟아져 내렸다. 보따리들을 이고 짊어지고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모습이 여기저기에 보였었다. 그렇지만 부산역에 도착해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단다. 나는 엄마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동생과 함께 엄마옷을 잡고 따라 다녔었지. 부산에는 엄마와 아빠를 잃은 전쟁고아들을 보호하는 고아원이 많았단다. 미국의 도움으로 고아원은 운영되었고 약과 먹을 것을 도와주었단다. 너희 부모들이 후원하고 있는 월드비전을 통해 한국은 6.25 전쟁때 다른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았었다. 부산 친척집에는 28명이 복닥거리며 살았고 학교에 가니 학생수가 많아 4학년으로 들어간 나는 주로 옥외에서 수업을 했었다. 교실은 5 6학년이 사용했고 저학년들은 길에 있는 계단이나 운동장 나무 그늘 산에서 무릎에 두꺼운 합판을 놓고 쓰고 땅바닥에 엎드려 공부를 했지. 비가 오는 날은 쉬는 날이 되었고 종이가 부족해 매끄럽고 흰 종이가 아니라 재생해서 만든 누런 종이를 사용했었지.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아껴 쓰면서 구구단을 외우고 책을 읽고 열심히 공부했단다. 당시 학생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학용품이었지. 지금 우리 손주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유행하는 브랜드 신발을 사는 너희들은 할머니가 떨어진 신발을 꿰매어 신고 다녔다면 상상할 수 있을까? 옥수수 빵을 학교에서 주면 집에있는 동생을 생각하고 주머니에 넣어가던 친구도 있었지. 전기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공부 그만하고 불끄라던 부모님들도 있었다. 전쟁은 이렇게 가난을 가져 왔단다. 조금 쓰고 버리는 매끄럽고 하얀 종이들 여기저거 굴러다니는 연필과 크레용 몇 번 마시고 버리는 캔음료 버려지는 음식들 이런 것들을 보며 아깝고 죄스런 마음이 든다. 아끼라는 말은 6.25 전쟁으로 가난을 경험한 할머니의 잔소리가 되었다. 61년전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 우습기도 하고 재밌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쟁은 무섭고 비참한 것이란다. 부모를 잃은 고아가 생기고 자식을 잃은 부모는 평생동안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비극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옥수수 죽도 못먹어 배고픔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많단다. 우리 손주들은 전쟁이 없는 평화 안에서 남을 도우며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2011-07-18

[6·25 수필 공모 입상작-우수상] 곰팡이가 핀 건빵

먹을 것이 풍부한 이곳 캘리포니아에서 건빵하면 있으면 먹고 없어도 찾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유기농 식품을 찾고 건강을 챙기기 시작한 이래로 건빵도 보리건빵 현미건빵 심지어 홍삼건빵이니 다이어트 식품으로 개발되어 맛도 좋고 먹을 만합니다. 그러나 제가 어릴 때 건빵은 엄지손가락만 하게 크고 넓적하고 밋밋한 밀가루 건빵뿐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 맛이 없었지만 먹을 것이 흔하지 않던 시절 건빵은 없어서 못 먹었습니다. 누런 봉투의 커다란 건빵 한 봉지 들고 밖에 나가면 동네 친구들을 한 줄로 세우고 한 알씩 한 알씩 나누어 주며 유세를 부릴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 군에 다녀온 삼촌이 건빵으로 요리를 해 주는 데 정말이지 맛있게 먹었습니다. 냄비에 물을 조금 넣고 발을 대고 건빵을 위에 올려놓습니다. 김이 나면 그 위에 설탕을 살살 뿌립니다. 그리고 떡을 찌듯이 폭 찌면 달면서도 몰랑몰랑한 것이 꼭 작은 케이크 같이 맛이 있었습니다. 튀겨서 먹어도 맛있습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건빵을 얹고 설탕을 살살 뿌려서 튀기면 바싹바싹한 쿠키와 같은 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건빵하면 떠오르는 잊을 수 없는 6.25때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곰팡이가 핀 건빵'입니다. 전쟁이 터지고 6개월 후 1951년 1월 엄동설한에 강원도 한 산골 벽촌 중학교에 어린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적게는 16살에서 스물 갓 넘은 결혼한 학생까지 중학교 1학년에서 4학년까지 120여명의 중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나라를 구하려고 나선 것입니다. 한 선생님의 인솔로 경북 춘양에서 기초군사 훈련을 받고 바로 전쟁터에 투입되니 이들은 영월 간성 김화 양구 등지를 두루 헤매며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크고 작은 전공을 여러 번 세웠습니다. 가장 큰 전공은 중공군에게 포위된 국군 3사단을 구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6.25전쟁 중에 이들 중 18명이나 전사했습니다. 그들 전사자 중에 한 나이든 학도병의 이야깁니다. 한창 때에 어린 학생들이 완전 군장을 하고 자기 키보다 큰 M1 소총을 들고 행군을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6.25전쟁 중에 겨울 추위는 왜 그리 추웠는지 여름에 더위는 왜 그렇게 더웠는지 모릅니다. 얼마 안 되는 주먹밥은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간혹 미군용 건빵이 간식으로 나오면 순식간에 먹어치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한 나이든 학도병은 한두 알 입에 넣곤 먹지 않았습니다. 슬그머니 싸서 배낭에다 넣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고향집에는 먹지 못하여 굶주리는 동생들이 줄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빨리 집에 돌아가 이 건빵을 동생들에게 주어야지." 맛있게 건빵을 먹을 동생들을 눈에 그리며 한알 두알 모은 것입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 잡고도 계속해서 건빵을 모았습니다. 중공군이 개입하고 강원도 중부 전선엔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전투가 아주 심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날 하루에 3명이나 전사자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안타깝게도 동생들을 주려고 건빵을 모으던 나이든 학도병이었습니다. 시신을 수습해 가매장하고 동료들은 울면서 애국가를 부르고 울부짖으며 교가를 불렀습니다. 모두 다 퉁퉁 부은 눈으로 전사한 그 동료의 배낭을 열어 보았습니다. 배낭 안에서는 식기도구와 옷가지와 함께 더러는 곰팡이가 핀 건빵들이 주르륵 흘러 나왔습니다. 동료들은 그 건빵을 움켜지고 다시금 목 놓아 울었습니다. "살아서 동생들에게 갖다 주지?" "네가 이렇게 죽으면 이 건빵은 누가 네 동생들에게 갖다 준단 말이냐!" 어린 학도병들은 흩어진 건빵을 보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친구 학도병들 몇 명이 전사한 학도병의 고향집에 들렀습니다. 늙으신 부모님에게 유품을 전해주고 마지막까지 장렬하게 전사한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오열하는 부모님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친구를 타향천리에 묻고 살아 돌아온 학도병들은 죄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살아 돌아온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었습니다. 미리 싸온 건빵 한 보따리를 어린 동생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건빵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고 아주 신나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건빵 한 보따리에 마냥 즐거워하는 어린 동생들을 보며 살아 돌아온 친구 학도병들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오래 두어도 곰팡이가 잘 피지 않는 건빵인데 곰팡이가 피도록 먹지 않고 모아두었던 그 건빵은 비록 나이든 학도병의 무덤 앞에 묻혔지만 그 건빵을 한알 두알 모으던 그 학도병의 마음은 그의 동생들과 그 후손들의 마음 속에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사는 우리 대한의 백성들 아니 태평양을 건너온 우리 코리안 아메리칸들 마음속에도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태백중학교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존경하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아들이 씁니다.

2011-07-18

[장려상] 아, 그날이여!

1950 년 6 월 27 일, 어머니는 서울 혜화동 이모 집에서 걸어 걸어 인천 집으로 돌아 오셨다. 만일 다음 날 떠났더라면 아마도 어머니는 불귀객이 되었으리라. 6 월 28일 새벽 3 시 한강교는 폭파되었고 숱한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서울에선 전쟁이 났다고 시민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피난을 떠나는 사람 들이 갈팡 질팡 길을 메우고 북새통을 떨었다. 어머니는 죽어도 가족과 같이 죽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새벽녘에 이모 집을 나섰다. 그리고 저녁 밤 늦게 인천 집으로 돌아 오셨으니 100리 길을 꼬박 걸으신 것이다. 개나리 봇 다리 하나를 머리에 달랑 이고 인천 집으로 들어 오시자 어머니는 그만 몸을 가느지 못하고 쓰러 지셨다. 얼굴엔 땀과 흙 먼지에 쌓여 분장한 배우의 얼굴 처럼 참담하게 보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몰골을 보시고 화를 버럭 내 셨다. “ 뭐 하러 내려 와 서울에 가만이 있지 .” “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서울은 인민군이 처 들어 온다고 야단 난리가 났는데 죽어도 같이 죽자고 온 사람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어머니는 힘 없이 중얼거렸지만 악에 받쳐있었다. 어머니의 죽어도 같이 죽자는 말은 우리 가족에게는 의미가 담겨있는 말이다. 나의 고향은 장화 홍련전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철산 이다. 고향에서 우리 집은 2000석 정도의 부농으로 남 부러울 것 없이 잘 살았다. 그러다 1945 년 8 월 해방을 맞았다. 북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우리 집은 초 죽음이었다. 공산 당원들은 아버지를 일제시대 때 일본놈의 앞잡이고, 농민을 착취한 반동 분자라고 몰아세웠다. 1 게다가 기가 막힌 일은 그렇게 순하고 착하던 우리 집 소작인들이 아버지의 목에 낫을 들이대고 생명을 위협했다. 소작인들은 공산주의라는 단어도 알리 없었다. 공산당원들은 소작인들을 혁명의 주체세력이라고 추겨 세우고 그들을 이용하여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공산당원들의 술수에 우리 가족은 죽음 앞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낮 12 시 까지 집을 비우라는 통지 문이 우리 집 대문 앞에 붙었다. 집은 군 인민위원회 에서 접수 한다고 했다. 이들은 우리 가족을 고향에서 멀리 떠나 중강진 이라는 벽촌으로 이주 하라고 지시 했다. 반동분자는 과거 농민을 착취한 만큼 고통을 받으며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한다는 것 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데리고 남으로 떠나기로 결심 했다. 벽촌에 가서 고생고생 하다 죽으니 보다 죽기를 각오하고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 가기로 했다. 아버지는 남으로 내려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판단이 옳았고, 아버지는 현명했다. 우리 가족은 1948 년 7 월 초, 38 선을 넘어 자유 대한으로 내려 왔다. 그리고 조카가 살고 있는 인천에 터를 잡고 정착 했다. 그야 말로 월남 피난민이 된 것이다. 그런데 기구한 운명은 북에서 내려 온지 2 년 만인 1950 년 6 월 25일 공산당이 남으로 처 내려 오다니 북에서 도망하다 싶이 남으로 내려온 우리 식구는 불안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북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온 우리 식구를 반동분자라고 몰아쳐 죽이지 않겠는가 하는 두려움 속에 가족과 같이 죽겠다는 어머니의 기막힌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으리라. 그 때 나는 12 살이 였고, 인천 축현 국민학교 5 학년 이였다. 북에서 김일성의 인민 학교를 3학년 까지 다니다 남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북한 실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배운 북한의 국어 교과서에는 미군을 “ 양코백이 ”라고 증오하며 코를 크게 그려 놓고 미국 놈들을 다 함께 찔러 죽이자며 총 검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었다. 2 산수 책에도 마찬가지로 10명의 미군을 인민군이 몇 명을 때려 잡으면 몇 명이 남는가 하는 식의 도전적이고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는 전쟁 교육이 였다. 나는 남으로 내려와 그야말로 판이하게 다른 민주 교육을 받았다. 예를 들면 사과 10 개가 있는데 철수가 두개를 먹으면 몇 개 남지 하는 식의 교육에 나는 흥미를 느꼈다. 그런데 나는 이북 사투리 때문에 반 아이들 한테 많은 놀림을 받았다. 하여간 우리 가족은 피난 생활을 잘 꾸려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원래 장사꾼이 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인천 중앙시장 입구의 배다리라는 곳에 터를 잡고 고무신 장사를 했다. 배다리라는 곳은 원래 인천이 개항 직전 배가 닿은 곳이라 해서 배다리라고 불렀다. 그러다 대한 제국이 최초로 경인철도를 놓을 때 바다를 메우고 뚝을 쌓고 철로 다리를 만들었는데 그대로 배다리 라고 했다. 배다리는 지역적으로 육로로 서울에서 인천으로 들어 오는 관문이다. 주안에서 국도를 따라 들어 오면 배다리에 이르는데 사방 팔방으로 갈라지는 지점이다. 배다리 뚝 넘어는 바다 물이 들어 오는 갯벌이 였는데 방죽을 쌓고 흙을 메웠다. 그 터에 시장이 크게 형성이 되어 주변 촌락에서 모여드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다 보니 시장이 점점 커저서 중앙 시장이 형성되었다. 철로 따라 올라 가면 동인천 역이 나온다. 우리 집은 동인천 역 못 미처 철로 뚝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쩌다 기차를 타거나 내릴 떼에는 역 구내로 들어가지 않고 기차 철로로 되돌아 나와 뚝 밑인 우리 집 뒷 문으로 들어 오면 되었다. 동인천 역에서 위로 올라가면 내가 다니는 축현 국민하교가 있고 그 위로 더 올라 가면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서있는 만국 곻원(지금의 자유공원)이 있다. 이 공원에 서서 인천 앞바다를 훤이 바라 볼 수가 있다. 배다리 철둑 옆에 파출소가 있는데 네거리 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 파출소는 항상 소란했다. 그 파출소 바로 앞 길 건너에 우리는 공터에 판자로 가계를 짓고 고무신 장사를 하고 있었다. 3 당시에는 주로 검은 고무신이 였고 흰 고무신은 귀했다. 인천 주변 촌 사람들이 농사지은 쌀, 조, 보리, 닭 등 농산물을 가지고 와서 고무신과 바꿔가는 물물 교환의 수단이 많았다. 당시 나는 개구장이 였고 사고 뭉치였는데 우리가 하는 고무신 장사 보다 가계 앞 배다리 파출소에서 일어 나는 사건들이 흥미로웠다. 죄인들인지 많은 사람들이 파출소로 잡혀 들어 갔다. 얽어 매고, 수갑이 채워지고, 형사들이 발갈로 차고 줘어 박고 때리는 소리가 우리 고무신 가계까지 들려왔다. 그럴 때면 나는 호기심에 파출소로 달려가 창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곤 했다. 그런데 잡혀 오는 사람들이 도둑질한 사람 같지 않고 젊은 학생들이 많았다. 어느 날 파출소 안을 언 듯 들여다 보았는데 학교 반 친구의 누나가 잡혀 왔다. 인천 여중을 다닌다는 누나인데 형사들이 누나의 가방을 뒤집더니 무언가 종이 뭉치를 꺼내 얼굴에 들이 대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착하게만 보이던 그 누나의 살기스러운 눈매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 종이가 삐라였으리라. 나중에 안 일이지만 누나는 인천 여성동맹의 말단 세포였다고 한다. 인천에는 지방 빨갱이가 많았는데, 그중 명문 인천 중하교, 인천 여중 선생들이 많았다. 이들 공산주의 자들은 남노당 계열로 인민군이 인천에 들어오기 전에 사전 지하 공작을 하고 교란 작전을 했다고 한다. 7 월 초 어머니가 서울에서 내려 오신지도 몇 일이 지났다. 어머니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는 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소식통에 의하면 서울은 인민군이 들어와 완전 빨갱이 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인천은 아직 인민군은 들어 오지 않았다. 시내는 너무 조용했다. 배다리 파출소는 텅 비어 있었다. 4 정막이 흘러 소름이 돋았다. 어느새 배다리 파출소의 경찰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적막감이 들어찼다. 밤이면 북쪽 멀리에서 섬광이 번득이며 포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흙 빛으로 변했다. 공포에 떨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몰랐다. 12 살 짜리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위를 알리가 없었다. 헌데 전쟁이 나고 우리가족에게 어떤 재앙이 닥쳐 온다는 사실은 느낌 으로 알 수 있었다. 7월의 태양은 강열하게 초목을 불 태우고 있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인민군은 남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인천은 비껴가고 있었다. 그저 낙동강을 향해 진격 했다. 부산을 점령하면 전쟁은 끝나는 것으로 믿고 밀어 붙첬다. 인천의 소시민들은 전쟁은 어떻게 되건 살기 위해 예나 다름 없이 부단이 움직이고 있었다. 촌 사람들은 쌀이며, 보리며, 감자 고구마를 가지고 중아 시장으로 몰려왔고, 우리 집은 고무신 장사를 계속했다. 장사가 잘되다 보니 얼마 전 가계에 도둑이 들었다. 가게 판자를 뜯고 고무신을 훔쳐 간 것이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는 가계를 지키기 위해 저녁이면 가계에 나가 잠을 잤다. 저녁을 먹고 나면 나는 아버지와 함께 가게로 나가 공부를 하고 아버지는 하루 매상 장부를 정리하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 날밤 나와 아버지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었다. 아니 죽음을 맛 보았다. 새벽이 었을가 멀리서 굴렁쇠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에서 희미하게 소리가 들리더니 점차 소리가 거칠게 울려왔다. 틀림 없이 인민군 전차였다. 인민군 6 사단의 전차들이 인천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저항을 받을리 없다. 썰물이 빠져 나가듯 인천엔 국군의 흔적도 없이 후퇴를 했으니 말이다. 5 덜컹거리는 전차가 배다리 앞까지 와 섰다. 어느 쪽으로 갈까 사방 팔방으로 나 있는 길을 선택하기 위해선지 전차는 정지하고 포신을 좌우로 돌리고만 있었다. 나와 아버지는 판자 문틈 사이로 밖을 내다 보았다. 분명 인민군 전차였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집채만한 인민군의 전차가 서있는데 공룡같이 보였다. 앞에는 포신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또 뒤에서 덜컹거리는 쇳 소리가 들려 왔다. 계속 전차가 들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제일 먼저 나타난 전차가 갑자기 배다리 파출소를 들이 받는 것이 었다. 파출소가 부서지는 파열음의 소리는 엄청나게 울려 퍼졌다. 벽돌로 쌓은 파출소가 구멍이 뻥 뚫리더니 전차가 파출소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파출소는 완전 박살났다. 그리고 뒤로 후진이 잘 되지 않는지 강한 엔진소리가 나더니 전차가 뒤로 빠른 속도로 쑥 빠져 나오면서 나와 아버지가 있는 우리 가계를 덮쳤다. 순간이 었다. 나와 아버지 는 전차에 깔려 죽는 줄만 알고 납작 엎드렸다. 전차는 가계 집웅을 날려 버리고 전차 바퀴 사슬이 나의 눈앞에 까지 닦아와 정지 했다. 한 뼘 정도의 거리에서 전차의 굴렁쇠가 멈추었다. 나와 아버지는 꼭 껴안고 이제 죽는 구나 생각 하며 몸을 떨었다. 그런데 전차가 눈 앞에서 정지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지금 생각해도 이상했다. 하느님이 나와 아버지를 지켜 주신 것이라 믿었다. 얼마 후 전차의 뚜껑이 열리더니 인민군이 머리를 내 밀었다. 그리고 전차 위에 실린 벽돌을 발로 흘터 내고 있었다. “동무 ! 쌍 간나 새끼들 한 놈도 없어 ! ” 인민군의 말 소리가 들렸다. 함경도 말씨였다. 전차 안에 있는 동료 병사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전차는 인천 부두가 방향인 신포동 쪽으로 올라갔다. 6 전차의 굴러 가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다시 정막이 왔다. 무서웠다. 나는 온 몸을 가느지 못했다. 아버지는 더했다. 돌 부처 모양 꼼작 달삭 못 하셨다. “ 아버지 !” 나는 아버지를 불렀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정신이 드시는지 나의 손을 꼭 잡으신다. 그렇게 한 두어 시간을 보냈을가, 새벽이 닦아 왔다. 아버지는 부셔진 문틈으로 밖을 내다 보았다. 새벽 거리는 싸아하고 짙은 안개에 쌓여 있었다. 아버지는 도둑 고양이 모양 사방을 드리번 거리시더니 나의 손을 잽 사게 잡아 끌었다. 그리고 가계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왔다. 한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 빨리 가자. ” 나와 아버지는 달렸다. 죽음의 장소에서 탈출 하듯 박살 난 파출소며 부서진 가계를 뒤로 하고 달렸다. 집 쪽으로 뛰었다. 어떻게 달렸는지 모르게 집에 와서 문이 부서저라 두들겼다. 놀라며 문을 열어주는 어머니를 제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와 나는 마루에 누워 헐덕 거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시간이 지나니 좀 진정이 되었다. 정말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사이 학교에서 통지가 왔다. 학교에 나오라고는 소집 통보였다. 나는 학교에 갔다. 학생들이 얼마 없었다. 순해 보이던 학교 선생님 여럿이 학교에 나와 내무서원인지 인민군인지 지시를 받고 있었다. 집에 와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했더니 전부터 빨갱이였었나 보다 하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말조심하라고 이루셨다 .그래서 북한 사투리를 숨겼다. 흑시나 나로 인해 월남한 가족으로 들통나면 어쩌나 하고 어린 생각에도 조심했다. 하여간 나는 북한에서 배웠던 “ 김일성 장군 ”의 노래며 인민군 군가를 다시 배웠다. 우리는 발을 번쩍 들어 올리는 인민군 제식 훌련도 받았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교육도 받았다. 7 다른 아이들은 신기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루했다. 얼마 후 놀란 사실은 파출소에 붙잡혀 고역을 치른 학교 반 친구 누나가 민족 해방의 승리자로 영웅 칭호를 받고 앞장 서서 인민의 반동 분자들을 색출하며 다녔다. 경찰관 , 국군의 가족을 색출하고 나선 것이다. 소름이 끼첬다. 우리는 인민군 전차에 박살난 고무신 가계를 다시 수리하고 장사를 계속했다. 중앙 시장은 여전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상거래를 하고 있었다. 8월 달을 들어 서면서 공산 당원들은 바삐 움직였다. 공산 당원들은 마구잡이로 시민들을 노력동원에 끌고 나갔다. 낙동강 전선에 이상이 생겼는지 사람들을 잡아가고 의용군으로 잡아갔다. 아버지는 나이 때문인지 의용군은 면하고 노력동원으로 뽑혀 월미도 공사장에로 끌려 다녔다. 월미도를 요새화하기 위해 진지 구축 작업을 한다는 것이었다. 월미도에 포대를 세우는 진지작업인데 인천의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 되었다. 때로는 소 월미도에도 진지 작업을 했다. 인민군은 월미도를 요새화 했고 언젠가는 연합군과 일전을 하리라고 예측을 한 것 같았다. 8월이 다 지날 무렵 인민군은 발악했다. 나이를 불문하고 의용군을 뽑아 갔고, 노력 동원에 극성을 부렸다. 아버지는 핑계를 대고 노력동원에 빠졌다. 그리고 집 뒤 기차 뚝 아래에 방공호를 파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가족이 들어가 숨을 장소를 만들었다. 그 때에 삼촌이 시골에 숨어 있다 우리 집에 찾아 왔다. 한 다리에 붕대를 칭칭감고 지팡이를 집고 들어 왔다. 생 발바닥을 칼로 찔러 상처를 내고 환자로 위장한 것이다. 나는 놀랬지만 좋아 하는 삼촌이라 신이 났다. 삼촌의 말로는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 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였다. 얼마 후 유엔군의 대 반격이 있으리라고 귀뜸을 해 주었다. 하늘 높이 비행기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득거리며 날랐다. B 29 라고 했다. 8 내가 가장 좋아 했던 비행기는“ 쌕쌕” 이 젯트기인데 어느 사이에 나타났는지 “씽”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면 비행기는 벌서 저멀리 날으고 있었다. 점점 비행기가 나타나는 횟수가 많았다. 인민군도 “ 쌕쌕”이가 나타나면 공포에 떨며 민가에 뛰어 들어가 숨거나 마차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중앙시장에 비극적인 일이 벌어 졌다. 하루는 “ 쌕쌕 ”이가 중앙시징을 한 바퀴 돌더니 갑자기 중앙시장의 수 많은 시민들을 향해 기총 소사를 하고, 네이판 폭탄을 투하 한 것이다. 다들 “ 쌕쌕 ”이를 좋아 하던 시민들이었는데 무슨 변고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시장에는 인민군도 없었고 전쟁물자도 없었다. 시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장사를 하고 있는 상인들에게 폭탄을 퍼 부었으니 숫한 사람들이 죽었다. 비행기가 떠난 후 나는 시장으로 달려가 보았다. 피가 넘처 흘렀다. 정말 처참 했다. 어느 누가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부터 나는 그렇게 좋아하던 “ 쌕쌕”이가 싫어 졌다. 전쟁은 어느 쪽이든 믿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민들은 기아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먹을 것이 없었다. 인민군은 공출이라고 해서 현물세를 받았는데 곡식을 몽당 빼앗아 갔다. 어머니는 가족의 연명을 위해 보리 죽을 끓으시느라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않이 었다. 보리 죽도 없었다. 고구마 줄거리에다 호박을 넣고 호박 죽을 끓으셨다. 그렇게 입에 풀칠을 하면서 하루를 살아만 했다. 나는 정말 고구마 줄거리에다 호박을 넣은 호박 죽이 싫었다. 그래서 호박죽을 슬적 버리다가 어머니한테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어느덧 가을의 한기가 스며 들었다. 가끔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만국공원으로 갔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 보시면서 의미 심장한 얼굴을 하시었다. 그런데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함정들이 인천 앞 바다에 빼곡이 들어 서 있었다. 그렇게 많은 함정을 나는 본적이 없다. 마치 바둑판에 바둑알이 잔득 깔려있는 것 처럼 함정들이 인천 앞 바다에 깔려 있었다. 9 어느 날 부터 아버지는 집 밖을 나가는 것을 금 했다. 우리 집은 점점 밖의 세상과 차단을 하면서 지냈다. 집을 비우고 철로 둑에 파 놓은 굴속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고무신 가계도 아에 문을 닫아 버렸다. 전쟁 막판에 지방 빨갱이들이 너무 무서웠다. 1950 년 9 월 15 일 새벽. 아버지의 예감이 들어 맞았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 되었다. 세계 대 전사에서 유례가 드문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인천 앞 바다는 상륙작전하기에는 좀 힘든 곳이다. 썰물 때 인천 앞바다 갯벌이 최고 3.2 KM 나 노출되어 합정이 상육 지점 까지 접근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인천 항의 간만의 차는 평균7 m 에서 심 할 때는 10m의 어려운 조건이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성공적인 인천 상륙 작전 만큼 통쾌한 순간은 없었다. 연합군 비행대는 월미도 제방 위에 설치해 놓은 인민군 장갑차를 일시에 폭파 시켰다. 그리고 소 월미도와 월미도 전체를 융단 폭격을 시작했다. 건너편 인천항 포대에서 인민군의 응사가 있었으나 함포사격과 비행기의 공중 폭격으로 이내 저항이 사라 젔다. 깊은 밤에도 함포 사격은 계속 되었다. 인천시 전체를 융단 폭격을 하고 있었다. 바다 쪽에서 부터 시내 안 쪽으로 1m 간격으로 폭격해 들어 오고 있었다. 우리가 숨어 있는 방공호 가까이 함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 뚝 방공호 근처까지 함포가 터 졌다. 포탄 파편이 푸드득 푸드득 풍뎅이 소리를 내며 날아 다녔다. 방공호 입구에 막아 놓은 기차 쇠 바퀴에 파편이 부디 치는 쇳 소리가 쨍쨍하고 울려 퍼졌다. 아버지는 지혜로으 셨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것, 기차 바퀴로 방곻호 문 앞을 막은 것은 정말 잘 하신 것이다. 그 기차 바퀴가 우리 가족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방공호 속에서 이불 을 뒤집어 쓰고 하느님에게 기도를 올렸다. 어머니가 기도를 하고 나면 아버지가 하고 그렇게 함포가 터지는 가운데에서 기도 만을 했다. 그 함포 폭탄이 방공호 주변에 터지고 파편이 난무하고 있는데 우리 방공호 입구에 검은 물체가 닥아 와 섰다. 얼마나 급했던지 그 물체는 허락도 없이 우리 방공호 안으로 들어왔다. 10 그 물체는 다름 아닌 인민군이 었다. 인민군은 장총을 들고 있었다. 아마도 월미도 진지에서 겨우 살아나 시내로 탈출한 모양이다. 서울방향으로 가자니 자연 기차 철로를 따라 가는 것이 정확하다고 판단을 해서 서울로 향하다 함포 사격 으로 더이상 갈 수가 없어 우리 방공호로 기어 들어 온 것이다. 우리는 긴장을 했다. 흑시나 우리 식구 모두 다 쏴 죽이고 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침착했다. 그리고 사랑이 가득했다. 인민군의 손을 잡고 이불 속으로 끌어 들였다. 우리 식구와 합께 이불 속에 머리를 밖았다. 어머니는 기도를 했다. 기도를 하는데도 함포 사격은 계속되었다. “ 하느님 이 불상한 자식을 살려 주시고,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편안이 목적지 까지 인도해 주옵서소 아멘.” 어머니의 기도 속에 목적지는 인민군의 고향을 말하는 것이리라. 어머니는 간절히 빌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조용해 졌다. 함포 사격이 멈춘 것이다. 우리 가족은 머리에 쓴 이불을 걷어 올렸다. 방공 호에는 우리 6 식구 외에 인민군이 함께 있었다. 낯선 인민군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울고 있었다. 인민군은 어려 보였다. 17 살 정도의 누나 나이 또래였다.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인민군을 쓸어 안고 빨리 떠나라고 나직이 말을 했다. 어머니의 떠나라는 말은 고향의 부모한테 가라는 말인 듯 했다. 인민군은 아무 말 없이 방공호 밖으로 나 갔다. 아직도 밖은 캄캄한 밤이었다. “ 잘 가시요. 조심 하고. ” 어머니가 먼저 말을 했다. “ 잘 계시라요. 고맙스다레. ” 인민군은 철로를 따라 엄둠속으로 사라젔다. 우리 가족 모두가 허망하고 허탈한 마음이 었다. 방공호 속에서는 이불을 같이 들러 쓴 인민군의 생사에 마음이 아팠다. 살아 고향 부모에게 갈가 아니면 도중에 죽을가. 새벽 동이 텄다. 무섭고 두려웠던 어둠은 가시었다. 더 이상 함포 사격은 없었다. 11 그 무서운 함포 사격에서 우리 가족은 살아 남았다. 아마도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이 응답을 해주신 것이다. 우리 식구는 방공호의 공포에서 벗어나 피난을 가기로 했다. 우리 식구는 각자 물건을 챙겨 가지고 집을 나섰다. 포화 속에 시내는 불타고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 앞이 보이질 않았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피난을 갔는데 바보 같이 우리 식구만 함포 사격속에서 살아 남았다. 우리는 주안 쪽 수봉산 절로 가기로 하고 발을 옮겼다. 얼만큼 갔을가, 송도 쪽에서 군대 행열이 인천 시내로 들어 오고 있었다. “ 어느 쪽 군대야 .” 하고 아버지가 물었다. “ 미군인데 .” 삼촌이 재 빨리 대답을 했다. “ 그러면 다시 돌아 가야 겠네. ” 어머니가 오랜 만에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 오는데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 났는지 많은 사람들이 창고를 털고 있었다. 인민군이 소유했던 창고며, 빈 집을 털고 있었다. 비단과 광목을 들고 다니는 사람, 쌀을 포대로 지고 끙끙거리는 사람 시내는 무법 천지가 되었다. 나도 잽사게 창고로 달려 갔다. 무엇이나 집어 올려고 어머니가 말리는 것도 모른체 하고 집 근처 창고에 들어갔다. 창고에 들어 가니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이미 인민군이 다 가지고 간 빈 창고 였다. 그렇게 많던 물건들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래도 흑시나 하고 빈방을 이리저리 들러 보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분명 사람의 소리였다. 소리 나는 쪽으로 살금 살금 가 보았다. 주위에 피 자국이 있고 피 묻은 옷가지가 흩어져 있었다. 나는 가만이 서서 귀를 귀우렸다. 12 “ 동무 어떻게 하면 좋겠오 ?” 사람의 목소리가 나즉이 들렸다. “ 군관동무, 나도 모르겠습니다. ” 울먹이는 소리였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함포 사격 때 방공호 속으로 들어온 인민군이 생각 났다. 나는 밖으로 튀어 나왔다. 마침 해병대 아저씨들이 길 양쪽으로 갈라 서서 행진하고 있었다. 나는 해병대 아저씨 앞으로 달려 갔다. 그리고 벽돌 집 안을 손으로 가리켰다. 해병대 아저씨는 너무도 빨리 알아 차렸다. 나의 손 끝을 보더니 몇 명의 해병을 데리고 벽돌 집 안으로 날렵하게 들어 갔다. 얼마 만인가 안에서 총소리가 “ 탕 탕 ” 울렸다. 나는 깜작 놀랐다. 인민군이 죽는구나 그런데 얼마 후 두명의 인민군이 두손을 높이 들고 나오고 있었다. 한 명은 장교 바지를 입고 또 한명은 군복을 아에 벗어 버리고 내의만 입고 있었다. 마음이 씁슬했다. 어제 저녁 방공호 속으로 살려고 들어온 인민군 이나 별 다름 없는 군인들이 었다. 이제 1950 .6.25 전쟁은 60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 때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그리워 진다. 내 나이 70이 넘었으니 그 때 사람들은 거지반 세상을 떠 났으리라. 그리고 6. 25 전쟁의 흔적은 하나하나 사리지고 그 때의 아픔을 망각하고 있는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전란 속에서 살아 남은 인생의 무상 함, 동족 상잔의 민족 비극이 이 땅에 다시는 일어 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끝 >

2010-07-20

[장려상] The importance of the Alliance between South Korea & USA

I was so frightened and shocked when I heard the news that the navy vessel Cheonan of South Korea was attacked by North Korea and 46 soldiers in the vessel were lost. While the Korea government performed the examination of what caused the catastrophe, I saw the U.S. government help the Korea government all the while. It was so impressive that the two countries worked together. So I have thought about the alliance between the two nations and why it is so important. The alliance between South Korea and U.S.A. has been strong and important in both history and in the present. When the Korean War took place from June, 1950 to July, 1953, approximately 36,940 American soldiers died trying to defend South Korea from communism. With the help of the American soldiers, South Korea could keep democracy and be a free country. Since then South Korea has developed economically and politically while North Korea still remained the same as a poor country under a dictator ship. If South Korea had been suppressed under communism, South Koreans would not have freedom of expression, religious freedom, any kind of rights, and they would be all equally poor and miserable. This time again in March 2010, when Cheonan was attacked by North Korea, the U.S. government supported South Korea in every side. The strong alliance between South Korea and U.S.A. is still effective and supportive to each other. When the Hurricane Katrina hit the south-eastern coast of America in August 2005, there was a big disaster. The hurricane was one of the five deadliest hurricanes in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836 people lost their lives and thousands of displaced residents were in desperate condition. But who came to the rescue? South Korea! South Korea provided displaced residents with money to recover and rebuild shelters. South Korea and U.S.A. protect each other according to the alliance. Imagine this; if America is under attack by another country, South Korea would surely fight back the other country. Also it‘s vice versa; if South Korea is attacked by the communists of North Korea, America would fight back North Korea, too. If either country is in trouble, they would help each other. This explains why the alliance is so helpful. The alliance between South Korea and U.S.A. also shows a good example to all other countries. In my mind I think it explains that every city, country, and continent should unite so that the world can be a better place. Cooperating is always better than competing, because like everyone always says, “Two heads are better than one.” So the two countries take part in building a better world through their strong alliance. As in the videotaped message of President Obama at the Korea Society 2010 Annual Dinner in New York, he said, “the alliance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Republic of Korea is needed now more than ever… you have the full support of your friend and ally,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 believe it’s true. All we need to do is strengthen the alliance between South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n this way both countries can exceed to greatness such as being world power leaders.

2010-07-20

[우수상] 내가 겪은 6.25전쟁과 천안함

1950년 3월 2일 찬란한 햇빛과 맑은 공기로 꽉찬 아침 운동장 조회때 교장선생님께서 각 학년 반 담임 선생님을 발표했다. 우리 선생님의 성함은 탁인섭 선생님이셨다. 조회를 마치고 교실에 들어오니 선생님께서는 이미 들어와 계셨다. 출석을 부르시며 미소띤 얼굴로 우리를 바라 보셨다. “여러분, 오늘 부터 함께 생활하게돼 반갑습니다. 앞으로 공부를 잘해야 겠어요.” 선생님을 간단히 소개하면 평양에서 서울로 오셔서 여기까지 오셨다고 하셨다. 평양에서 남부럽지 않데 살던 가족은 북한이 공산정권에 들어 서게 되면서 아버지가 지주래서 공산당에게 끌려가 재산을 다 빼앗기고 억울하게도 학살을 당했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분개해 대동강변으로 뛰쳐나가 절망중에 신음하시가 결국 쓰러져 처함하게 돌아가셨다. 나는 남동생과 안식구, 딸아이와 북한에서 살수가 없어서 북한을 탈출해 남동생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게 됐다. “여러분을 만나게되 참으로 반갑습니다.” “여러분들 집에사거 부모님께 서신을 드리세요.” “불학불식한 소생이 귀댁의 자녀들의 교육을 맡게되 양 어깨가 무겁습니다. 하오나 사도정신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란 간단한 글을 써 주셨다. 우리들은 깜짝 놀랐다. 북에서 오셨다는 말씀, 괴로느런 삶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 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말씀 드렸더니 “이럴수가! 선생님께서 고생이 많으시구나” 하시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셨다. 학교 관사에 사시게 된 선생님께 간장, 된장, 고추장, 장아찌 등 밑반찬을 보내드렸다. 선생님께선 학교에서 실시하는 가정방문을 하시면서 어린이 교육에 참고하시는 훌륭하신 선생님이셨다. 때마침 농번기 방학을 하였는데 학교에서 급히 오라는 연락이 와서 달려 갔더니 “금석아, 우리 가족 너희집에서 올 여름만 지내면 안될까? 지금 부모님 어디 계시니?” “오늘 저희집 모심는 날이에요” 라고 대답한 후 집에 돌아오면서 곰곰히 생각하니 정말 걱정이 되었다. 논으로 달려가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선생님께서 올 여름을 우리 집에서 지내고 싶으시대요. 어쩌면 좋아요?” “선생님 사정이 그러시다니 어쩌겠니? 걱정하시지 말고 오시라고 지금 곧 달려가 말씀 여쭤라” 나는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단숨에 달려 갔었다. 그날 석양에 선생님께선 이불 봇짐을 메시고 사모님은 아기를 업고 오셨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정성껏 저년 식사를 대접하셨다. 선생님 내외분 염려마시고 내집처럼 편히 쉬시도록 안방을 내드렸다. 우리 부모님께선 밤마다 선생님 내외분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시고 대화를 하셨다. 나는 중학교에 진학 꿈을 이루려 동아전과, 모범전과 두 권을 읽고, 쓰고, 외우고 호롱불 밑에서 12시를 넘겼었다. 한번은 ‘무슨 얘기를 저렇게 밤마다 하실까?’ 하는 생각에방문 앞에 가서 얘기를 들어보니 북한에서 핍박 받으며 살아온 얘기, 언제 죽을지 절망 속에서 살아온 얘기 부모님들의 참혹한 죽음, 죽음을 각오하고 무릅쓰고 월남한 얘기 내친김에 일본까지 가려했으나 여기 전북 진안군에 머물고 보니 지하랑 소굴이어요. 사모님은 훌쩍 우시고 선생님께서도 목 메인소리로 머지 않아 북한 괴뢰군이 여기까지 쳐들어 올테니 몹씨 걱정이야유. 며칠후 동네 사람들이 모정에 모여 봉두씨땍에 와 있는 선생은 학교 관사로 가시도록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주일이 되어 공산당은 지서와 면사무소에 쳐들어와 각 마을 지하당원을 파악하고 연락망을 조직 했다는 것이다. 지서장과 순경들 면장과 직원들은 피신하고 목사님은 끌려가 총살당했고 지하당원 집은 제외하고 우리동네에서는 우리집에만와서 시계와 금품을 내 놓으라고 괴롭혔다. 동네 청년과 우리반 아버지들은 지하당원으로 밤이면 전기줄 끊고 다리 끓는일을 계속 해오던때 동네 친절한 분들은 걱정을 했다. 봉두씨네 댁에 아마 서울에서 경찰관인 형들 또는 검찰청 근무하는 조카들이 온건지도 몰라. 날만새면 수근거리며 우리집의 감시를 받던중 드디어 아빠께서 당원들에게 끌려가 구금되었었다. 여름방학중인데도 인민군 노래 배우라고 등교를 하라 하였다. 학교가는길에 도시락을 갔다드리며 창백하여진 아빠얼굴을 뵈오니 송구스럽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버지께서 지금 고통 당하시는 것은 우리선생님의 가족들이 우리집에서 지내셨기에 동네 사람들의 오해와 의심을 샀기 때문이 아닌가? 난 엄마뵈올 염치가 없었다. 며칠후 엄마께서 해질녘에 취나물 무침을 갖고 친형제 처럼 지내는 최창근씨댁 대문안에 들어서자 어쩌면 좋으니 화를 면할 방법이 없을까? 창근씨의 할머니 음성이 어렴풋이 엄마귀에 들려 왔었다. 이모님, 방금 그 말씀 무슨 뜻이에요? 잘은 내 몰라도 지서에 갇힌 사람들 오늘밤에 차에 실려 계곡으로 가면 죽엄을 면할길이 없대, 어마나 이게 무슨일이래요.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었다. 집에 돌아 오셔서 우리들을 끌어안으시고 통곡을 하셨다. 새벽녘에 “여보 나야” 들릴 동 말 동 아빠의 음성이 들려 왔다. 한숨 자지 않고 온 식구들은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쉬잇 조용히 방에 들어오시지 않고 그 길로 어디 먼 곳으로 가셨다. 천우 신조로 살아 오셨다고 어머니께선 하나님께 기도로 날을 샜다. 어머니께서 산고개를 넘고 넘어 금광에 은신해 계시는 아버지께 이틀에 한 번씩 도시락을 날랐다는 것이다. 괴로 장들은 끌려간 양민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총을 쏘았을 때 총알에 맞기 전에 맞은 사람과 같이 쓰러져 살아 돌아 오셨단 이야기를 얼마 후 들은 바 있었다. 공산당은 “신봉두 간나 새끼가 없어졌는데 내놓으라우, 어디메다 숨긴 거야?”소리소리 지르며 갑자기 총부리를 들이대어 깜짝 놀라신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내손을 잡고 성화대는 공산당을 따라 을미산 밑에 가서 금석 아버지 소리쳐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오늘은 해가 저물었으니 내일 찾아보자고 한 동네 사는 우리 반 강계순의 아빠가 당원들을 납득시켜 집에 오게 되었다. 금광에서 아빠는 굶주림과 고뇌에 시달려 사경에 이르렀다. 또 한편 옥구군 미면 미룡동에서는 양민을 붙잡아다 깊은 우물에 투신하고 돌로 눌러 인간 젓을 담던 잔인무도한 공산당 들이었다. 또 창고에 여름 내내 가두어 두었던 수십 명을 불러내어 괭이와 고갱이로 찍어 죽여 소금을 끼얹었다니 잔인무도한 괴로 도당 들이었다. 그러자 추석이 돌아 왔는데 동네 아낙네들이 여기 저기 모여 수군거렸다. “공산당들이 쫓겨 가고 있데, 국군들이 돌아오면 우리 동네 아저씨들은 어떻게 될까!” 근심 띄운 음성들이었다. 이분들은 지하당원 아내들이었다. 16개국의 유엔 참전 용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공산당들은 후퇴하게 되었다. 공산당들은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 양민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산에서 나무하다가 산촌 사람들은 마당에서 콩타작 하다가 날아온 총알에 맞아 죽은 사람이 많았다. 우리 가족들도 마당에서 콩타작 하다 죽을 뻔 했다. 우리집 왼편 산등성이에 총대를 메고 누리끼리한 군복차림에 힘빠진 걸음 거리로 지나가며 총성을 울릴때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몇개월이 지나 추운 겨울이 왔다. 동네 청년들과 지하 당원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어 공산당 행각을 했다. 이들은 쫓기는 북괴들과 합류하여 이북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이다. 빨치산으로 지리산까지 못간 잔당들은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서(산) 지내며, 밤이면 내려와 소, 돼지, 양식등을 빼앗아 가며 어느땐 제사 지내기 위해 준비한 제물도 다 가져가기도 했다. 그들은 동상에 걸려 고생도 했다고 했다. 몇개원후 중공군의 참전에 따라 연합군이 대규모로 퇴각한 사건으로 1951.1.4 일은 서울을 공산진영에 빼았겼다. 이 때 국민들은 하루 바삐 서둘러서 쌀을 볶아 가루를 장만하고 피난 준비에 애를 썼다. 엄동 설한의 피난준비는 그때 들은 어머니 말씀으로는 오금이 절였었다고 하셨다. 그때 일을 생각하고 이글을 쓰니 손이 자꾸 떨리는구나! 그후 8개월이 지나 맥아더 장군의 진두지휘아래 유엔군의 도움으로 서울을 다시 찾게 되어 전주, 광주, 대구, 부산 등지로 피난 살이 했던 경기도민, 서울 시민들은 역경에서 벗어나 서울로 입성하게 됐을 때 집은 불타 없어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학교 공장, 대규모의 빌딩의 파괴 부모 잃은 전쟁 고아가 수백만에 이르고 달했고 목숨 바친 국군과 유엔군도 수 백 만 명에 이르렀다. 6.25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준 상처는 오늘까지 깨끗이 아물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일꾼들은 살기 좋은 국가 건설에 힘을 다했건만 지금껏 조국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된 국가로 세계인들이 주시하고 있어 부끄러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이 어찌 한탄스럽니 않을 소냐. 그런데 이번 황당한 천안함 사건 이 어찌 된 일인가 통탄스럽기 그지없구나! 정부나 국민이 안보 불감증을 벗어나지 못한 탓이 아닌가 천안함 사건이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 공식회부되어 천안함 사건을 유엔 안보리에서 다뤄줄 것을 암보리 의장국에 제출했다는 것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한 것임이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 명백히 드러났다 하여 유엔 안보리가 이번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엄중하게 대응해 줄 것을 요청하고 이번 북한의 공격행위를 규탄하고 사과와 재발방지를 촉구하는 내용의 일반 결의안을 추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하는데 우리 정부에서는 그렇게까지 되도록 안보에 무관심하며 살고 있었을까. 발을 굴러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을 소냐. 정부나 정부요인들, 국민 모두가 안보 불감증에 사로잡혀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러면 73세가 되도록 대한민국 여인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아오는 동안 하여온 일이 무엇인가 반성하여 보지 않을 수 없다. 학생들에게 달리는 투사와 같은 용기와 끈질긴 인내와 불같은 집념으로 숭공통일을 위해 일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우수두뇌로 성장시키기에 노력하여 왔으며 해마다 6월이 오면 반공교육 행사에 힘썼다. 실천사항으로 학년(전학년)초부터 숭공일기쓰기를 실시하여 우수학생 학급당 3~4명을 선정하여 표창하였고 멸공 웅변대회ㆍ멸공 글짓기대회ㆍ멸공 그리기대회를 실시하여 6.25를 상기시켜 안보의식 고취, 반공애국정신을 고취, 함양코저 반공학습 자료실 설치 운영, 반공관과 반공복도 환경 구성하여 반공교육에 시범학교가 되도록 노력했다. 이제 와서 내자신에 대하여 실적이 만족하지 않았다고 후회를 하지 않는다 도지정 반공시범 연구학교 연구주임으로 최선을 다했으니 말이다. 오늘이 6월11일. 머지않아 6월 25일이 다가온다. 6.25때 참혹하게 돌악ㅏ진 선친들과 호국영령들께 참배와 묵념을 드렸다. 가신님들이여! 묘소 주변엔 산과 바람, 허공과 해와 달, 별만이 펼쳐있으리라 생각하노니 앞으론 우리 민족의 살과 피와 함께 어우러져 하루 빨리 국민 모두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진리와 자유의 나라가 되어 땅따로 물따로 관리하지 말고 한 덩어리가 된 무궁화 활짝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평화 꿈틀거리는 대한민국을 행복지수가 5위안에 드는 국가로 건설토록 약속 드리오리다. 대한민국의 천안함 파괴로 돌아가신 46인의 고귀하신 수병들에게 앞날의 조국의 비전을 바치오리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님들은 국민의 멍든 가슴에 깊이 남아있습니다. 가신 임들이여! 우리 국민 모두에게 억장이 무너지게 하고 슬픔을 안겨주심으로 철통 같은 안보의식을 고취시켜주셨습니다. 우리는 울먹이며 애국애죽하신 수병님들을 위한 행진곡을 편히 잠드시도록 조용한 행진곡을 불러드리오리다. 아아 잊을 수가 있으랴. 우리 천안함 부서진 이날을 땅을 치며 격분에 찼던날을 잊으리오! 앞으로 그날의 원수를 갚겠나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부의 요인이나 국민모두의 안보불감증을 원망하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안보에 관심을 단단히 가질 각오가 되어있지 않고거야 북괴의 남친야욕을 물리치기 쉽지 않을 것이며 수상하면 간첩이 아닌가 예리한 통찰로 지혜를 모아 철통같은 안보태세로 북괴들의 남침야욕을 벽리 뽑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북한은 경계선을 넘나들고 2002년 서해 교전도 잊을 수가 없다. 북한과 교전 2분 뉴스속보는 국민들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정부는 북한에 엄정한 통보를 하고 침착하고 의연히 대처했으나 북한은 아랑곳 없이 우리를 얕보고 천안함 사건을 또 이르킴이 아닌가? 국민들이여! 청통같은 안보태세로 악독한 북한의 남침야욕을 잠재웁시다. 하늘이여! 땽이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강력한 안보태세에 강인한 힘을 실어 주소서.

2010-07-20

[우수상] The Memories In Yongsan

The most breathtaking life story that I interviewed which occurred during the Korean war was from my uncle Jongdae Kim. It is a wonderful, sad, funny, exciting, affectionate, human feeling account that emphasis on the importance of friendship and family. In this essay, I am going to write a brief story of my uncle’s life during the mass departure of the Korean war. Jongdae Kim was born on December 12, 1940 in the southern part of Korea at Yongsan, Seoul. Yongsan is in the country side in Seoul. Yongsan was larger than a village and smaller than a city. People from there, made their living out of agriculture and dairy farming. They did one of the most important jobs for the country’s economy. Jongdae‘s father, on the other hand, was a police from the city, so everybody knew him and respected him. There were four members from his police squad. They all wore gun belts, cross-draw belts, and bowties. Jongdae’s mother was a typical Korean house wife. She would wake up at five in the morning and put wood into the furnace to cook rice and prepare warm water for her husband. She would crouch down next to the boiler and use a newspaper to fan the fire, which will increase the heat so that the rice can be completely cooked. Jongdae was born before their parents were married and four years later, they had another boy Jongchul, and two years later Younghee was born, their first daughter. Memories growing up in Yongsan was wonderful for Jongdae. Summer was the best time for him. He was always excited when summer was on it’s way. He wasn’t the only one who was excited, his younger brother Jongchul and all the kids from the neighborhood were too. School was almost out and play time was near. Summer has the longest days and shortest nights, which means he gets to play outside with his friends like there is no tomorrow. However, he felt little sad for some of the children who studied or help their parents with farming. During those days, he liked going to the Han river with his friends to swim. It was the only way to escape the heat. When he wakes up in a summer day, his younger brother Jongchul and him would quickly brush their teeth, eat breakfast, rice and kimchi, and they would first go rushing to Sungjin’s house which was not far from where they lived. Sungjin’s family was a little wealthy than Jongdae‘s. It was observable by his appearance because he was a foot taller than Jongdae and he had a body of a Ssireum wrestler Other children were frighten by his appearance at first, but once you get to know him, he was a sweet and a lovable kid. Both of his parents were farmers. They grew crops and raised animals. Sungjin had pigs, ducks, chickens, rabbits and couple cows. Playing with different kinds of animals was one of the reasons that Jongdae liked playing with him, but what he really liked about Sungjin was that he was very courageous. One time, they were stealing some bag of noodles from this lady’s store and they were caught at the scene, but Jongdae managed to get away. However, poor Sungjin wasn’t a good runner so the store lady catch up to him and grabbed him by his ear and dragged him all the way back to the store When Jongdae ran home, he knew he was going to be dead meat. Pretty soon the lady from the store will come knocking on his door. However, no one came that night. Later, he found out that Sungjin didn’t rat on him. Jongdae was very surprised by his brotherhood. Sungjin saved his life. Otherwise, Jongdae’s father would have beat the living hell out of him. From that incident, Jongdae started to look at his friend differently. Now that they had Sungjin with them, three of them: Jongdae, Jongchul and Sungjin, headed over to Youngho’s house. Youngho was the total opposite of Sungjin. Youngho was a very small and skinny kid who wore these thick glasses. He was a poor kid, probably the poorest kid from the city. He only ate two meals a day and when he was feeling hungry at night, he would just go to sleep early. He lived with his mother, a widow, and two younger brothers who were also small and skinny. Out on the fish market, his mother would sell fishing nets and baskets that she made on her own. Youngho wasn’t allowed to play outside during the school days because after school he would have to go to the fish market and help his mother with the sell. Therefore, summer was the only time that Jongdae and his friends get to play with him. At school, Youngho was always a good student and he stayed away from trouble. He was not an athletic. When other children played soccer, he would just sit in the corner and read a book. You could say he was a boring kid. Now all four of them had united, Jongdae and his little brother Jongchul, Sungjin, and Youngho, they all hurried to the Han river up on the hills passed the evergreen trees. When they arrived at the river, they were the first ones to be there. But pretty soon, group of kids would come from everywhere. Most of the kids were from the same school that Jongdae went, but because it was summer, they brought their cousins and friends from other cities Jongdae, Jongchul, Sungjin and Youngho would climb to the top of the muddy cliff and take turns diving. Before they jump down into the shallow water, they would scream something from the roof top, for example like Jongdae, he would say something like: “Summer vacation would never end!” Sungjin, the chubby kid, would say: “ I wish I get a new bike for my birthday!” He always complained about walking to school. Jongchul would scream something similar to his brother: “I wish we play like this forever!” And finally, Youngho, the skinny kid would say: “ I wish I’ll eat chicken for the rest of my life!” Chicken was his favorite food, but he gets to eat chicken very occasionally, like once a year. One day, at the river, it was summer of ’49, this kid named Babo came running down to the river like he had seen a ghost. Although, his real name was Sukho, all the kids nicknamed him Babo, meaning stupid in Korean, because he stammered when he spoke. He was gasping for air and his entire face was covered in perspiration. It took a while to catch his breath and finally he opened his mouth: “ D-do…you…w-want to see something c-cool?” Almost all the kids at the river agreed to follow Babo. They were behind him, whispering to each other in a curious voice, “Where is he taking us?” All the kids asked him in a chant what he was going to show them, but Babo ignored them and just kept on walking faster. He was trying to keep them guessing along the way. Jongdae personally thought Babo had seen a dead body or a naked women. But naked women was pretty off the subject because there were girls who followed him too. Sungjin asked him, “Is it a dead body?” Youngho asked, “Did you fine a bag of money?” Jongchul asked, “Is it a ghost?” But Babo smiled and shook his head and said, “M-much b-better than that.” They finally reached a fence. All the boys started to climb the fence, but the girls chickened out and decided to give up and headed back down home. Jongdae and his friends didn’t even bothered to try pursuing the girls to come back because they might get in their way. All six boys made it over the fence: Jongdae, Jongchul, Sungjin, Youngho, Babo, and this other kid who they just met at the river. Every body climbed the fence clean, but Sungjin was a heavy kid so a piece of cloth from his pants had caught on the fence and made a big hole on his butt, revealing his red underwear. Jongdae and his friends couldn’t help them selves from laughing. “Who wears red underwear?” Jongdae asked Youngho, giggling. Then Sungjin heard what Jongdae said and pushed him with his weight. The friends laughed the whole time walking where ever Babo was taking them. As the laughter slowly faded, Babo kept telling them, “W-were almost here.” “W-were almost here.” Jongdae warned Babo this would have to be good. Sungjin said he was starting to get hungry and Youngho was getting kind a scare and worried. They have been walking like that for at least twenty minutes. From a distance, Jongdae and his friends started hearing people laughing and talking. They were also hearing something that was being hit with an object. “Thud…thud…thud!” When they approached closer, group of adults gathered around and was doing something. “Thud…thud…thud!” Jongdae and his friends all sprawled down on their stomachs behind a small hill, Jongdae felt like he was in a war ready to attack. Now all six of boys had a perfect view. A man in his mid forties, wearing a white tang top in a straw hat, was hitting something with a baseball bat that was hung upside down. When the man switched position to the right to hit the object again, it gave them a better view. The friends all looked at each other in a shocked expression. The man was hitting a dog. It was a very big, black dog and it was dripping blood for the tip of the mouth and seemingly it appeared dead because the dog was not making any sound. Another man, also in his mid forties, was crouched down carving a knife against the sharpening stone while pouring water on it. Another man was smoking a cigarette while talking to the man who was beating the poor dog. That was the first time Jongdae and his friends actually had witnessed an animal that was brutally beaten and killed. It was the most gruesome and violent act that they saw. Jongdae asked Babo why were they beating the dog. Babo said they were hitting the dog with a baseball bat to make the meat tender and when the dog is dead, they will skin it, cut it, cook it in a pot and eat it for dinner. He said dog meat was good for the human health. Babo had much knowledge on those areas than most of the kids at his age. Perhaps because he was an explorer. He collected insects and dissected them. He starts conversation with anybody that comes in his way, including strangers. At dinner that night, Jongdae suddenly lost his appetite thinking about the dog early afternoon. The thrill of going there with his brother and friends to witness that was exciting, but he couldn’t get that dog’s image off his head for a long time. Jongdae and his friends hung around like that during the summer all along, but when the war broke out between the north and south Koreas, those fun days in Yongsan was quickly vanished. On Sunday morning, the 25th of June, the North Koreans attacked. Jongdae was 9, his brother Jongchul was just 5, and his baby sister Younghee was only 3 years old. Jongdae remember that day vividly. There were people scrambling down from a hill shouting, “The Communists are coming!” “The Communists are coming!” Jongdae realized almost all the people from the neighborhood were clustered outside the deck near the river. Jongdae was with his father at the time holding his hand. Most of the people outside were grown ups, talking to each one another in an anxious tone. As Jongdae and his father approached closer, they heard something inside the gang. “Excuse us.” “Excuse us.” And they squeezed their way inside to the crowd. The noise was coming from an radio and people sitting down on the deck was listening to it carefully like it was about to give them orders. A women on the right was breast feeding her baby while a trickle of tear was slowly coming down to her cheek Men on the left were puffing cigarettes regularly. All the people around them looked gloomily. Mrs. Lee, who was the oldest women in Yongsan, was on her knees, praying, rocking her body back and forth and whispering something religious under her breath. Five days before the Korean war, fortunately, there was a rumor that the North Korean army will soon invade at Seoul. Jongdae’s father and the people from Yongsan figured it wasn’t safe here anymore. Mr. Lim, the city’s barber, had already gone off to Taegu, where his brother lived. Mrs. Choi, the owner of a small market, emptied the store and went near Pusan, along with many people from the neighborhood. Jongdae’s family decided to go to Chungpyong because his father’s older sister, Jongdae’s aunt, lived there. Jongdae was born in Yongsan and he nearly spent his entire childhood there. The worst thing about leaving this place for Jongdae was he was not going to see his best friends, Sungjin and Youngho, anymore. On June 23, 1950, two days before leaving Yongsan, Jongdae and his father walked around the neighborhood to farewell to the others. Jongdae’s father first met with the elders who were evacuating to a village near the mountains, then he met three of his police buddies who were going to the country side near Inchon, and then finally he met his best friend Wong Jo. He was a bachelor. He was never been married. Jongdae’s father persuaded him to date women, but he wasn’t interested. Every time Mr. Jo visited their home, he would always bring loft of bread from his store. Jongdae’s father used to drink with him quite often, especially during the weekends. Jongdae and Jongchul would sometimes sneak up to them and grab some appetizers like dry squid and peanut. Next, the father and son went to see one of Jongdae’s best friends, Sungjin. His house was very close from theirs. Sungjin’s father opened the gate and invited them in. Sungjin and his father really resembled. His father was the biggest guy from the city. He had a body like a pro wrestler. He was a heavy drinker. Jongdae heard this from Sungjin that his father often beats him when he was drunk, but nothing serious. Jongdae’s father often wondered what did Sungjin’s father eat as a child that made him a giant. And there was Sungjin, he was the little version of his father. He had his father’s belly, the lopsided ear, dark skin tone and slanted eyes. While the grown ups were talking inside having tea, Jongdae and Sungjin stayed outside, sitting down on the wooden patio. The sun was starting to disappear behind the hills. The two friends were petting Dodo, Sungjin’s mutt, while figuring out what to say to each other. Jongdae was feeling depressed that he wasn’t goiug to see Sungjin anymore. Jongdae believed that Sungjin felt the same too, but it seemed he was hiding his emotions. Jongdae realized his friend was trying to be macho. Every time Jongdae talk about leaving this place, Sungjin would just say funny and exciting things that they did together growing up here. Jongdae figured Sungjin’s way of saying good bye was to talk about the good memories that they had here. Jongdae remembered when they first met. Sungjin was sitting next to him in class. Jongdae’s first impression of him was some fat ugly kid who didn’t speak much. Jongdae would have never pictured him as his best friend. Jongdae learned he should never judge by person’s appearance. When the grown ups finished their cup of teas, Sungjin and his parents walked the father and son to the gate to say goodbyes. The last house that the father and son went visiting was Youngho’s house. It was the most farthest house from the city The house was falling apart and it looked like no one lived there. The small front metal door to his house was opened and it was swinging by the wind and making a “Clank,” sound every time it shut. The father and son went inside and the father called in a calm voice, “Hello?’ “Is anybody home?” Then a door slide opened and it was Youngho, followed by his two younger brothers. Youngho said his mother went to the market and she will be back soon. Jongdae’s father stayed outside to smoke a cigarette and Youngho led Jongdae to his room, a room where two of his brothers shared. Youngho quickly opened a drawer from his old, wooden desk and handed Jongdae his expensive pen that he won at a math contest in school. Jongdae knew it meant a lot to him, so he refused to take it, but Youngho just kept on insisting him to have it. He never written something with that pen or took it out from the case. Jongdae felt guilty not bring him any gift. Not like Sungjin, Youngho was sentimental. Youngho asked Jongdae where he was staying and when they were going to meet again. It took Jongdae by surprise, he only played with Youngho only during summer vacation because he had to help his mother after school. Moreover, Jongdae honestly wasn’t fun playing with Youngho because he wasn’t bold and crazy like Sungjin and he was always a shy kid. It was sure Jongdae was going to miss his friend Youngho. Jongdae and his father waited for Youngho’s mother for a while, but she was not back from the market. They decided to leave without seeing her, since Jongdae’s family had to do some packing of their own. By the time the father and son walked out from Youngho’s house, the evening was slowly fading into night. The wind was making the trees rattle. Jongdae was feeling a little cold. As they were heading back home, Jongdae was starting to miss the evergreen trees that stretched to the hills endlessly, the river where his friends swim, the market where Jongdae bought ice creams, the elders who sang and drank rice beer on the patio, and everthing about it was just making his eyes formed into tears. But somehow Jongdae believed they were going to come back sometime and things would be back to normal again. As Jongdae’s father puffed a last breath of the cigarette and threw it into the flowing water by the damp, Jongdae was seeing a girl walking toward their direction. Jongdae squinted his eyes to get a better look and he recognized who she was. It was a girl from his class. She was the tallest, smartest, and most loving person. Every boy in the class wanted her. Jongdae never talked to her before because he was sacred, but he gain confidence that day and decided to say hi. She said hi back and she waved her hand smiling at him. Jongdae thought to himself why didn’t I do that earlier. Jongdae had the courage to do that because he was leaving and he was afraid he might not see her again. At dinner, Jongdae, Jongchul, and their father sat on the floor by the table while the mother was preparing for dinner. Jongdae’s baby sister Younghee finished the last bottle of the milk and went to sleep early like usual. She was sleeping peacefully next to the lamp. Her face shimmering by the lamp’s light, the poor baby had no idea what was going on, which was good for her. Jongdae’s mother was serving each of them bowl of rice and setting the hot bean soup gently to the middle. The bean soup smelled really good. Jongdae was starving from all the packing and digging to help bury his father’s police uniform and badge. He said it wasn’t safe to carry around police uniform if he might get caught by the North Korean soldiers. He also told Jongdae and Jongchul not to tell anybody that he was working for the police, not even children. As Jongdae sat across from his father under the dim light, he noticed his father appeared very old with age. This was the first time Jongdae got a clear look at his face. There were tuffs of hair left on his head and his face was featured with many wrinkles. Jongdae looked at his mother now as she was softly slurping the soup with a spoon. Her eyes were tired from concern and there were dark circles beneath her eyes. Jongdae couldn’t see those flaws on his parents faces in daylight, but the little dim light that hanged from the top of the room revealed everything. When the family finished eating dinner, Jongdae’s father said he had something to say to them. Hopelessly, the father stared at his wife and Younghee. Then he took a good look at Jongdae and Jongchul. He cleared his throat and was about to say something, but Jongchul’s cough interrupted him. Jongdae handed over a cup of water to his brother and he drank it quickly. The father begin. He said tomorrow, it was going to be a long journey. Jongdae, Jongchul and the father will walk to Chungpyong where Jongdae’s aunt lived and the mother and Younghee will take a bus to go to a village close by with other people from the city. The father said it wasn’t safe for his wife and the baby to walk to Chungpyong. Then when the war settles down, the family will meet in time. Jongdae’s mother didn’t say anything that night, she had no choice but to agree. It was safe for her and Younghee to follow the people to the village because there was a small possibility that the North Koreans will invade there To be honest, Jongdae wasn’t worried much. When the war is over, his family will unite and they can go with their lives again. The next morning, the mother was crying, hugging both of her children, Jongdae and Jongchul . She wouldn‘t let go, almost suffocating them That moment Jongdae felt like he wasn’t going to see her again. The mother had Younghee tied securely around her back and she was carrying a sack full of rice that was formed into a ball, some clothes and a red cotton blanket. Jongdae and Jongchul carried nothing because it was going to be a long walk. Only thing Jongdae had in his pocket was the expensive pen that Youngho gave him. Jongdae’s father carried a blanket and some clothes. He gave his wife some money and had enough for his own Holding each others hands, the family walked out to the street very slowly to separate. They wanted to take up every second of their precious time together as a family. They finally reached the middle of the street where all the people from the city was getting ready to leave. There was a big bus parked under this huge tree. The mother and Younghee was getting on that bus. There were already people inside the bus, talking and crying and waving their hands to another. The father told his wife to be careful and not to worry about them and she said to Jongdae to stay with his father at all times and never let go of his brother’s hand. Carrying Younghee, the mother had her foot on the step to get on the bus and took a last glance at them. Jongdae, Jongchul and the father waved their hands to the bus like the other people around them, “Bye!” “Be careful!” and the bus slowly drove off, making a big storm of dust in the air. Jongdae looked up to see his father and his lower lip was trembling. He was about to break into tears, but when Jongdae was caught looking at him he turned his head and walked away. “Let’s go guys.” Now it was Jongdae, Jongchul and the father. They were headed to Chungpyong to meet their aunt. They were walking along with other people. Jongdae was holding Jongchul’s hand like he promised his mother. There was a family in front of them, pulling a farm cart full of stuff and on top of it, there was a little girl, about Jongchul’s age, holding a puppy. A family behind them were fighting the whole time, complaining about something. Jongdae, Jongchul and the father were walking for hours now. The sun was starting to blaze up. Jongdae’s eyes were getting fuzzy from the sun and he was starting to get sun burn underneath his arm pits. His mouth had dried up like sand paper. Jongdae was thirsty and so was his brother. Jongchul told his father he was having a cramp in his right foot. He was slowing them down. As they passed a abandon restaurant that had broken windows, a building had appeared from far away. They made theme selves to the building and found a shaded area and rested there for a while. It seemed like a neglected factory. The father pulled out the ball shaped rice that his wife made last night. He split into three pieces and all three shared. It was hard and crunchy. It was hard for them to swallow because they were out of water They drank all the water on their way here. Now all three of them were regretting they should have saved some of it. Perhaps, next time before they drink their water, they will think about the every drop that was going into their mouths. It was almost sunset when they reached a house. The father was carrying Jongchul on his back the whole time. He couldn’t walk because the cramp in his foot had worsen. The father gently put Jongchul down and knocked on a stranger’s door. Nobody answered. Their father continue knocking, this time pounding with his fist “Is someone there?” Then, the gate suddenly opened to a slit. A man’s face revealed. “Can I help you, sir?” The father begged the man if they can spend the night there, but the owner said the house was full of other people like them and he was truly sorry. The father was frustrated. They had to spend the night somewhere until they reached the aunt’s house. The father told his children they have to walk a little more and try looking for another place where there was less people. Jongdae was exhausted from walking. His legs were tired, it wouldn’t listen, but they had no choice. They couldn’t sleep in middle of nowhere. As the father and children passed some buildings, a small barn appeared at the corner. Carried on the back of his father, Jongchul was the first one to spot it. “Look!” “There is a barn!” They went closer to get a better look. There was a red wooden gate. Their father gave it a hard tug and opened the gate and a man with a shovel stood there. “What do you want?” the man asked the father. “Can we spend the night at the barn?” “I am planning to go to Chungpyong in the morning.” The man looked at Jongdae and Jongchul and then the father and scratched his bald head. “Ok, but just for one night.“ When they went inside the barn, it smelled really bad. There was a cow there tied to a metal pole. There were couple families like them sleeping next to a mountain full of straws. Jongdae and Jongchul examine the place to look for a spot to sleep, while their father went inside the house with the bald man. The father came back a few minutes later and was carrying a tin can full of rice. That was what they had to eat, just rice. The father and children ate with their bare hands. The father ate the less and Jongchul scooped the last ball of rice. The bald man was kind enough to give them food. They made them selves comfortable at the corner next to a small opened window. The summer breeze coming from the window felt good against Jongdae’s skin. Right next to them, there was a family just like them, except they had a mother. The parents were sleeping, but the kids woke up from Jongdae and Jongchul’s talking. The kids stared at them like they wanted to talk, but the place was quite in sleep that it was inappropriate to speak. They stared at each other and fell a sleep. The next morning, the father woke Jongdae up and his eyes couldn’t adjust quickly. It was very early, the sun hadn’t rise yet. Jongchul was still sleeping and Jongdae woke him up They got out from the barn and Jongchul was able to walk again. His swollen foot had eased down. The father warped a cloth around his foot. They were walking again. Like the day before, the father and children walked and rested through out the day. When they got hungry, they knocked on any house and asked for food. If the owners were nice enough, they will give them some left over food. At a near by playground, an old man was selling sweet potatoes and it smelled really good. Jongchul jerked his father’s shirt and begged for one. They had no money at the time and it was obvious that the man wasn’t giving them out for free. Jongdae took a deep breath and let it out in despair. He reached for his pockets again to check if he had any coins and suddenly came an idea. He had the expensive pen that Youngho gave him as a goodbye present. Jongdae asked the man who was selling the potatoes if he was willing to exchange the expensive pen for some potatoes and the man excepted the deal. Jongdae felt kind a bad at first, but they were very hungry. And if Jongdae tell Youngho their situation, he would’ve understand. Late in the evening, the father and children reached a house and luckily spend the night again. Finally, they reached Chungpyong. Jongdae’s uncle and aunt welcomed them with their hospitality. Jongdae’s aunt immediately asked the father where his wife was and he just put his head down and said, “Let’s go inside and talk.” Jongdae and Jongchul went into a room and there were their cousins, Seungja, Sookja and Soonja. They were all girls. It was nice to see them again. The last time they got together was new years, four years ago. At dinner, their aunt served them fried eggs and kimchi. Jongdae hated eating those food back home, but it tasted better than ever. The family stayed there for about three months. On late September, 1950, the battle of Inchon was over and Jongdae, Jongchul and the father were headed over to Inchon to meet the mother. They heard that Jongdae’s mother went to Inchon to stay with her relatives. Jongdae, Jongchul, and the father aboard to a bus where it was taking them to a train station at Inchon. The bus was packed with families like them. Jongdae and Jongchul was happy that they didn’t have to walk to Inchon. The war had settled down. General Douglas MacArthur landed at Inchon and turned the war around to South Korean‘s favor. He was a hero. People said the south was winning and there was nothing to worry about. Jongdae was soon going back to school and his father was going to work for the police again. Moreover, they were going to meet the mother. Jongdae wanted to see Younghee and kiss her cheek and make funny noises. She laughed really hard every time he did that. As the bus was taking them to Inchon, Jongdae looked outside through the window and it was a disaster. He never seen anything like this before. It was the war aftermath. The father covered Jongdae and Jongchul’s eyes every time there was a corpse, but he gave up doing that because there were to many of them. The whole place was deserted and there were big mass of dust roaming around in the air. There were children running around bare footed looking for their mothers or something. Buildings and stores were destroyed, bricks and broken concrete were only things left. There were stray dogs sniffing around looking for food. They were fat like pigs, probably surviving by eating human corpses. Jongdae could see some part of the ground were dug up and there were pile of corpses inside. There was a lot of tank trail marks as he looked down at earth. As their bus slow down a little to make a right turn, group of kids were running toward the bus and asking people if they had any thing to eat or if they had any money. The bus passed the sign that said “Inchon.” There were group of people protesting with banners and cardboards near the railroad. Jongdae saw American soldiers sitting down by a abandon store, eating some kind a cracker. One of the soldiers went down to his knees and was feeding a cracker to this tiny Korean girl. There were people and soldiers walking around everywhere, helicopters, jeeps, and trucks that were filled with people. Finally, the bus stopped to a halt and every body was getting off. The father and children reached the train station and there were people celebrating, all waving the Korean flags. The mother will soon get off a train and the family were to take the train to Inchon to stay at her relatives. Jongdae, Jongchul and the father arrived at the train station a little early. Jongdae and the father sat on the wooden bench and waited for the mother. Jongchul was drawing something on the ground with a piece of charcoal that he found on his way here. The father was constantly turning his head to the right if his wife’s train was coming. Three trains had stopped, but it wasn’t the train that the mother was in. Perhaps Jongdae’s mother’s train was running a little late. Finally a train had stopped and said on the top: Kyunginsun. It was the train that the mother was in. All three of them got up to their feet and was excited to meet her. After three month of hell, practically homeless, they were going to be a family again and have a home. People were stepping out from the train in all directions. Quickly, the station filled up with people. It was difficult to find the mother because of the people who were blocking their views. Jongdae and Jongchul were jumping up and down to catch a glimpse of their mother. The father shift his head side to side for a desperate look for his wife. However, there was no sign of her. Is she coming today? Jongdae wondered. Then, the three of them heard something from a far distance. “Hey Jongdae!” “Jongchul!” “Honey!” She was waving her hand to them near the ticket box. Jongdae and Jongchul ran as fast as they can and hugged their mother. The father was behind his children, walking slowly in relief. The mother started to ask all these questions really fast, “Jongdae, did you listen to your father?” “Where did you guys stayed?” “What did you guys eat?” “Did you guys get sick during the way?” All three of them asked similar questions to her too. However, they weren’t seeing Younghee. Perhaps, she already left her at Inchon with the relatives. The father asked his wife where Younghee was. Then suddenly, the mother’s face changed colors and she dropped to her knees and started to cry. The father went down, lift her head up and asked her what was going on. She was crying so hard it was making her hard to speak. The father helped her up to her feet and walked to a bench close by. The parents sat down on the bench and Jongdae and Jongchul were standing up, waiting for her answer. Now she was sobbing, her crying had slowed down. She tried her best to speak. Her mouth was trembling and she finally got it out, “Younghee…died from a cold.” She blew her nose with a handkerchief and continued crying. Jongdae’s baby sister caught a cold during the way to the village and died. There was a doctor onboard, but the bus didn’t carry any medicine. Sleeping peacefully by the lamp was the last time Jongdae saw Younghee’s innocent face.

2010-07-20

[우수상] 저 멀리 있는 고향

지난 3월 어느 새벽, 위층에서 탁구공 같은 물체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에 번쩍 잠이 깸과 동시에 순간 아파트 건물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이런, 지진이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그러지 않아도 빅원이 온다더니 드디어 올 것이 오는 가부다. 공교롭게도 남편 출장으로 나 혼자 있는데 어쩌나. 9·11이 터질 때에도 바로 쌍둥이 빌딩을 마주한 곳에서 나 혼자 있었더니만, 또.......’ 어쩔 줄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누워 있노라니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아 용기를 내어 조심조심 일어났다. 시간 있을 때 지진을 대비하여 중요한 물품들을 챙겨놔야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얼른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엄마 생일이라고 큰 아들이 제법 고심하며 골랐을 명품 가방에 내 딴에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서류부터 차곡차곡 넣었다. 여권, 은행 문서, 언젠가는 글을 쓴다며 글감을 정리해 놓은 내 가장 소중한 공책, 가족사진 몇장...문득 빛바랜 사진에 시선이 멈추었다. 몇 해 전, 한국에 다녀 온 친정 여동생이 낡은 사진첩을 뒤져 부모님의 젊은 시절 사진 몇장을 뽑아 나에게도 전달한 사진들이었다. 친정 부모님의 빛바랜 흑백 약혼 기념사진과 들러리를 셋이나 앞세운 당시로서는 꽤 근사했을 결혼사진, 학사모를 쓴 미남의 아버지, 세월이 흘러 모처럼 집 앞마당에서 3남매를 세워놓고 찍었지 싶은 가족사진, 지금의 내 두 아이보다 더 어려보이는 빨간 한복 차림의 내 옆에서 활짝 웃고 계시는 아버지, 훌쩍 커버려 교복 바지가 짧아진 우스꽝스런 차림의 오빠와 함께 서계신 아버지 등... ‘언제 찍었을까? 아버지와 이런 시간도 보냈었네!’ 온통 어둠이 기세 등등이 버티고 있는 3월의 새벽, 지진의 두려움은 아랑곳없이 어느 새 나는 가진 것은 없을지라도 마냥 행복했던 아득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실향민 아버지 내 친정은 6·25 동란 당시 원산에서 LST를 타고 이남으로 내려오신 실향민(失鄕民) 집안이다. 아버지는 4형제 중 셋째로 아래의 넷째 동생은 전쟁때 전사하셨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난통에 형님들과 헤어져 아버지 홀로 이남에 내려와 전전긍긍하다가 군대에 자원 입대하셨다. 전쟁에 나가는 일은 무서웠으나 적어도 숙식을 해결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는데, 약골인 아버지는 그만 늑막염을 앓게 되었다. 누구 한 사람 아는 이 없는 이남의 어느 초라한 곳-내 기억으로는 거제도 수용소라고 알고 있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간호사가 여기 저기 수소문한 끝에 기적처럼 두 형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필시 같은 곳에 있었는데 서로 몰랐으리라. 그 후, 두 형님들이 버팀목이 되어주며,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고는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여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그 어렵던 시절 대학과정도 마치셨다. 땡전 한 푼 없는 피난민 신세에 그 어려운 삶을 어떻게 살아내셨는지, 아버지의 고생담을 잘 들어 두었어야 했는데 너무 어렸던 탓에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어 안타깝다. 어마어마하게 큰 배가 온통 피난민으로 바글바글 댔다는 이야기, 사방에서 총탄이 날라 다녔고, 하늘에서는 폭탄이 떨어졌으며, 죽어 나뒹구는 시체들을 넘어 다녔고, 하얀 피부에 키가 이만큼이나 큰 러시아 군, 끝도 없이 밀려오던 중공군 등.. 6·25때가 되면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하는 다리 끊긴 한강의 모습 따위의 당시 사진과 더불어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전쟁의 무서움에 여린 가슴은 콩콩 방망이질 쳤다. 한편 어머니는 당신의 아버지와 내려오셨다가 영영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그만 이남에 살며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다. 교회에서 특창하는 엄마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반해 청혼하셨다는 아버지의 로맨스를 종종 듣곤 했었다. 외할아버지는 이북에서 교회를 많이 개척하며 신실히 믿음을 지키는 분이셨다고 한다. 집안의 장자인 오빠가 태어날 때 당시 최자실 권사가 받았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아마 외할아버지는 순복음교회에 다니신 것 같다. 어린 시절 엄마 손 잡고 교회에 갔었고 가끔 교회에서 심방 오신 것도 기억난다. 그러나 먹고 살기에 바빠 부모님은 점차 교회와 멀어졌다가 엄마의 유일한 친척의 전도로 후일 다시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실향민 삼형제 아버지 삼 형제가 각기 가정을 꾸려 외롭고도 고단한 실향민의 삶을 엮어갔을 우리들의 어린 시절, 설날과 추석에는 어김없이 큰 아버지 댁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 폭설이 내려 버스가 끊겨 버린 어느 해 설날에는 한참을 걸어 큰길까지 가서 가까스로 버스를 타고 큰댁에 간 기억도 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눈이 한 자나 쌓인 시골 길을 걸어가면서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눈길에 미끄러지며, 넘어지며 아버지 손을 꼭 잡고 큰댁에 가던 장면은 어느 영화 못지않은 아름다운 흑백의 추억이다. “어서 오나라, 우리 강아지들!” 변함없이 반겨주시던 큰 어머니의 함경도 사투리는 언제 들어도 푸근했다. 큰 아버지 두 분은 이제나 저제나 고향에 갈 날을 기다리다가 결국 나중에 가정을 꾸리는 바람에 사촌들은 나보다 어렸다. 올망졸망 어린 것들은 모처럼 대하는 떡국이나 잡채 등 평소에는 맛보지 못하는 푸짐한 음식에 배가 남산만 해졌다. 게다가 평소에는 보지도 못하던 과자나 사탕 따위를 한 보따리씩 받고는 마냥 신났었다. 큰어머니가 차려 주시는 음식은 얼마나 맛이 좋았는지.... 어린 것들 주머니에 세배 돈이 두툼해짐에 따라 아버지 삼형제의 형제애는 더욱 돈독해지며 실향의 아픔은 조금씩이나마 옅어졌다. 비록 온 가족이 함께 내려오지는 못했으나 삼형제라도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가까이 지낼 수 있음에 세 아버지는 서로 위로가 되었으리라. 졸지에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 물설고 낯설은 객지에서 살게 된 부모세대의 실향(失鄕)의 한(限)을 2세인 우리는 전혀 가늠할 수 없을지니....... 실향민 자녀 교육 자식들만큼은 잘 살게 해주고 싶은 아버지는 워낙 부지런한 성격이셨다. 설날과 추석 딱 이틀을 제외하고는 일년 열두 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게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고 앞마당을 싸리비로 쓸며 하루를 시작하셨다. 또 상당히 엄하여 1년에 한 두 차례 호되게 맞았던 기억이 있다. 그럴 때면 무척이나 내성적인 나는 며칠이고 엄마, 아버지에게 말도 못 부쳤다.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새삼 가슴이 아리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아 암울하기만 했던 60년대,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한 투자를 하며 예술적인 소양을 심어주기 위해 애쓰셨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고전무용을 배웠고 겨울방학때면 어김없이 스케이트를 탔다. 국문을 깨우치자 아버지는 어린 남매와 함께 시조가 적힌 카드놀이를 하며 은연중에 문학공부를 시키셨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후일, 학교에 다니면서 내가 알고 있는 시조가 나오면 그리도 기분이 으쓱했었다. 원산에서 LST를 타고 이남으로 내려오신 실향민 집안 부모 세대 실향의 한을 2세인 우리는 가늠할 수 없어 지도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장식품이자 교육자료였다 떠나온 고향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을까? 여러 번 이사를 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안방 혹 마루 벽에 커다란 지도를 붙여 놓으셨다.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딱히 집안을 장식할 멎진 액자 하나 걸어 놓을 여유가 없던 가난한 시절, 지도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장식품이자 더할 나위없는 교육 자료였다. 아버지 고향은 이쪽이고 휴전선은 어떻게 그어졌고,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경기도 여기고....... 이곳은 영국, 저곳은 미국, 여기는 소련....... 각 나라의 수도는 어디고....... 그 때부터 어린 딸은 온 세계를 마음에 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번, 바람의 딸 한비야 씨의 강연에 참석하였다. 워낙 유명 인사라 한 번 꼭 만나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두 장씩만 준다는 입장권을 떼를 쓰다시피 네 장을 받아, 모처럼 집에 온 둘째와 그 친구까지 합세하여 네 사람이 함께 강연을 들었다. 강사의 첫 이야기를 들으면서 갑자기 소리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린 시절, 그녀의 집에는 항상 지도가 붙었다고! ‘내 어린 시절, 우리 아버지도 지도를 붙여 놓았어요!! 또 나도 아이들 보라고 집에다 지도를 붙여 놓는데요.’ 한비야 씨네 집안도 이북 출신이었을까? 한 번 물어볼 걸....... 배운 대로 한다더니, 세월이 흘러 가정을 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 역시 가는 곳마다 지도를 붙인다. 한국 지도, 세계 지도에 한 장 더하여 미국 지도까지.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액자나 멋들어진 장식품도 많다지만 지도만큼 실속 있고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마누라의 드센 외침에 남편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단다. “이보시요, 남편. 무엇이 문제라요? 값이 비싸기를 해, 우리처럼 자주 이사하는 집에 무겁기를 해, 아니면 부피가 많이 나가기를 해, 왜 그런다요. 아이들 지리 공부도 할 수 있지,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 수 있지. 보라요. 저 유명한 한비야 집에도 지도가 붙어 있지 않았다요, 참말로. 우리 아버지는 안 그러셨는데, 어째 저리 다를까이?” 강연에 다녀온 뒤로 내 목소리가 한층 더 놓아졌다. 콧구멍만한 잡화 가게를 차려 식구들 먹이시느라 항상 누군가는 지키고 있어야 했다. 엄마와 오붓한 시간을 만들기가 어려웠던 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영화 구경을 가시기도 했다. 그럴 때면 집에 빨리 가자고 떼쓰던 기억도 있다. 외로운 타향살이나마 나름대로의 감성을 잃지 않으신 아버지셨다. 기독교 계통의 어느 학교가 좋다는 이야기에, 아버지는 어느 하루 온 종일 그 학교에 가서 지켜볼 정도로 세심하게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셨다. 비록 당신은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을지라도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오빠와 나는 그 초등학교의 3학년, 2학년으로 전학하며 서서히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교회에서 반주나 했으면 좋겠다는 부모님의 소원에 따라 당시로서는 귀했던 피아노도 배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1남 2녀, 얼마나 잘 키우고 싶으셨을까? 아, 내 아버지! 외로운 아버지 어린 시절 내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아버지의 모습이다. 1960년대 말 초등학교 5학년 무렵. 텔레비전에서 한국을 방문한 재일동포들을 환영하는 프로그램을 실황 방송한 적이 있었다. 가수들이 방문단을 위하여 노래를 부르는 시간 설움에 겨워 흐느끼는 재일동포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식구들이 모여 함께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아버지도 그만 감정이 복받쳐 엉엉 우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으면 아버지 같은 어른이 저렇게 우실까!' 그 때 흘러나오던 국민 가수 고복수 선생의 "두만강 깊은 물에"로 시작되는 노래나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등의 가요는 어린 내 마음에도 너무 슬펐다. '아버지의 고향이 함경도 어디라는데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그 후 '이북'이라는 곳은 내 마음 한 구석에 소중하게 자리하고 있다. 아마 중학생 정도 되었을 때다. 이북에서부터 아는 사이였는지 아니면 대학 친구였는지 '은행 아저씨'라 부르는 아버지의 친구가 있었다. 어느 은행인지 높은 자리에 계셨기에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부유하게 사는 집안이었다. 언젠가 우리 삼남매만한 자녀들을 앞세우고 초라한 시골 우리 집에 오신 적이 있었다. 선물이라며 주신 파운드케이크의 달콤함이라니! 살기에 바빠 일년에 한두 번 만나기 어려우나 아버지에게 '은행 아저씨'는 마음으로 의지하며 지내던 유일한 친구였다. 서울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을 소중한 사람. 한 번은 추석날 큰댁에 다녀오는 길 오래 만에 '은행 아저씨'의 집을 찾았다. 물어물어 찾아갔더니만 아니 이게 무슨 날 벼락이람! 가정부가 나와 하는 말이 주인아저씨는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단다. 식구들은 성묘 가셨는데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 기다리시라고. 망연자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친구의 유족들을 대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황망히 발걸음을 옮기셨다. 간신히 집에 오셔서 아버지는 나에게 찬송가를 쳐달라고 하셨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의 노래를 반주하던 일이. 그리도 흐느끼며 딸의 반주에 맞춰 찬송을 부르시던 아버지.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내 주께 가는 길 험하여도…"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십자가로 가까이…"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던 어린 딸도 피아노를 치며 아버지 따라 마냥 울었다. 이튿날 새벽 변함없이 가게 문을 여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리도 쓸쓸했다. 매사에 성실하게 본을 보인 아버지는 50을 두 달 앞둔 채 짧고 굵은 삶을 마치셨다. 담배는 전혀 입에 대지도 않으신 분이 폐기종이라는 병으로 그만 인생을 하직하신 것이다. 숨을 거두시던 마지막 순간의 평온한 모습은 언제까지라도 내 마음 속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큰 딸래미가 효녀라고 칭찬하셨다는데…. 애환의 한민족 미국에 살면서 그 옛날 어린 시절에 들었던 푸근한 이북 말씨를 종종 듣는다. 이남으로 피난 온 실향민 중에 많은 분들이 다시 미국으로 건너오신 연유다. 특별히 한국 교포가 밀집해 사는 나성에는 이북 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 한 두 마디에 이북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찌 그리 반갑던지. 이왕 고향 떠난 사람들 한 번 더 떠난다 하여 어려울 것 있었으랴? 벌써 올해로 6.25 동란 발발 60 주년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6.25 동란을 잊혀 진 전쟁이라고 한다는데 한국 사람으로 어찌 우리 잊으랴!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 3월 한국의 국립극장에서는 '아 나의 조국!'이라는 특별한 연극이 상연 되었다고 한다. 6.25 동란 발발 1년 후인 1951년에 북한에 끌려갔다가 수차례 파란만장 죽을 고비를 넘기고 43년 만인 1994년에 무사히 귀환한 조창호(1930-1994) 소위의 삶을 기리는 무대였다. 천신만고 끝에 이남으로 넘어온 조창호 소위가 국군 병원에서 육군 장성에게 귀환 신고를 하는 장면 등 감동적인 연극이었단다. 연극이 끝난 후 조창호 소위 역할을 한 배우가 살아 있는 전설 백선엽 장군에게 귀환 신고를 하며 모인 사람들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고. 그러나 관중의 대부분이 노인들로 이루어져 있어 연극의 실제 목적을 제대로 성취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고 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과거 역사에 너무 무지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만 가는 요즈음이다. 또한 6.25 동란 발발 60 주년을 기념하며 한국의 고석만 영화감독은 한국인 최초로 워싱턴 주 상원 의원이 된 신호범 박사의 일대기를 만든다고 한다. 다큐멘타리와 영화 50부작 드라마를 각각 '기적을 이룬 꿈' '산탄 총알(Bug Shot)' '그날이 오면' 등의 제목으로 올해 안에 완성하려고 준비 중에 있단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신호범 이라는 인물뿐만 아니라 6.25 동란이라는 굵직한 역사적 사실에 관하여 좀 더 정확한 면을 알게 될 것이라고. 1994년 무사히 귀환한 조창호 소위의 삶을 기리는 연극 6·25동란을 겪은 많은 분들이 작고하셨거나 연로한 상태 60주년이 되는 6월, 아버지날이라 더욱 생각나는 아버지 사실 한국의 식자층에서는 6.25 동란에 관하여 한국인이 만든 제반 작품이 별로 없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6.25 동란이 세계 역사의 중요한 획을 그은 엄청난 전쟁 중 하나인 만큼 거기에 필적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 대작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몇 해 전인가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이야기를 다룬 '요덕 스토리'라는 뮤지컬이 미국의 여러 곳에서 상연되었으나 그것도 다분히 탈북자들이 제작한 것으로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한다. 비근한 예로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또 최근에 나온 발키리 등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의 잔학성을 폭로하는 소설이나 영화는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 학살 추모관을 세워놓고 이러저러한 행사를 통하여 자신들의 과거를 세상에 알리며 후손들에게 산교육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이민 역사 100년을 넘긴 북미주의 한국인 가운데서도 한국동란에 관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작품들이 나올 때가 되었다. 내년에 LA 매스터 코랄과 LA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한국의 이산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음악으로 엮어 월트 디즈니 음악당에서 올린다고 한다. 한국인 여류 바이올리니스트가 출연할 예정이며 현재 한국에서 작곡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작곡가 우효원 선생의 곡도 포함시켰다고.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 무용 문학 등 모든 면에서 이러한 일이 진행되어야 하리라. 현재 6.25 동란을 겪은 많은 분들이 작고하셨거나 연로한 상태다. 각 가정에서나 각 교회에서 또는 정책적으로 그런 분들의 회고담을 잘 정리하여 후세대에게 제대로 알려야 할 것이다. 친정아버지의 행적을 정확히 보존하지 못하여 자식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못난 딸의 자책의 말이다. 잃어버린 아버지의 글 삼 년 전 성탄절 오랜만에 엄마를 위시하여 친정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오라버니를 통하여 알게 된 새로운 사실 하나. 젊은 시절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책을 낼 것이라며 당신의 행적을 기록한 두툼한 원고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셨다고 한다. 살기에 급급하여 또한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하는 통에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더니 결국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사라져버렸다며 오라버니는 매우 애통해 했다. 그 때는 너무 어려 그 두툼한 보따리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다고 못내 아쉬워하는 오라버니는 자신도 언젠가는 글을 쓸 것이라고 슬쩍 속내를 비쳤다. '정말 그렀네. 언젠가는 글을 쓸 것이라며 흔들거리는 아파트 속에서도 글감이 담긴 공책부터 챙기는 변변치 못한 동생이나 두 아들에게 수시로 장문의 긴한 편지를 써 보내는 오라버니나 그 아버지에 그 아들딸이었구나!' 우리 집안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언제부터인지 내 속에는 글을 쓰고 싶다는 아니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그동안의 의문이 스르르 풀리던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던 전율! '아 아버지의 피가 내 속에서 흐르고 있었구나! 아버지의 못 다한 꿈을 이 부족한 딸이 이뤄야 할 텐데. 이제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글을 써 볼까?' 어느새 아버지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났다. 이미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긴 못난 딸은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이라도 아버지의 삶을 따라 가겠노라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후일 아버지를 만나 아버지 떠난 후의 지난 세월을 도란도란 이야기 할 것이다.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딸로 어떠한 삶을 살아 냈는지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냥 흐뭇해하시겠지. 6.25 동란 발발 60주년이 되는 6월 또한 아버지날이라고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는 달이기에 새삼 더 그립고 보고픈 아버지다. 한국 역사의 험한 풍상을 오로지 몸으로 막아내며 그 거센 풍랑 까닭에 오늘 이 시간 바로 이 자리까지 견뎌 오신 장하고 장한 실향 1세대 모든 아버지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그 분들이 고향을 밟을 수 있는 날이 속히 돌아왔으면…. 〈끝〉

2010-07-20

[장려상] 내가 들은 6·25 이야기 '할머니, 그리고 한 미군 병사'

전쟁은 그 자체도 비극이지만 무엇보다도 슬픈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떼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족 친지 연인 등등 모든 관계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말했듯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민간인이다. 3년간에 걸친 한국전쟁으로 사망 실종된 민간인 숫자는 약 300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니 이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자고 하더라도 끝이 없을 것이다. 우연히 한 한국전 참전 미군 병사를 알게 되어 그의 체험을 듣고 한 한국 할머니의 처연한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이 저렸다. 미군 병사의 이름은 '월터 벤튼'. 계급은 상사로 당시 압록강을 향하여 북진하던 미 육군 3사단 소속이었다. 그의 부대는 북진중 대거 중공군을 만나 후퇴하게 되었고 결국 흥남에서 비운의 철수작적을 하기에 이르른다. 그가 말하는 이 이야기는 배가 떠나기전 1시간쯤 전에 벌어졌던 일이다.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 영하 20도 우리 부대는 모진 눈보라가 치는 흥남 부둣가에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수송선의 승선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모닥불가에 서있던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는 한 늙은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가까이와서 불을 쪼이라고 손짓을 했다. 처음에는 무척 망설이던 그 할머니는 마침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모닥불을 위로 펴서 뻗은 할머니의 손은 평생동안 험한 일만 한 탓인지 울퉁불퉁하고 굵은 매듭이 생겨 있었다. 이렇게 추운날 장갑도 없이 어떻게 동상에 걸리지 않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대형 물통을 밀어주면서 할머니를 앉게한 다음 무척 시장해보이는 할머니를 위해 깡통 통조림 몇개를 뜯었다. 이때 쯤 부두와 해안가에서는 미처 배에다 실을 수 없게된 식량 장비등 군수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이를 폭파시키기 위하여 야전 공병대들이 숨가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배운 짧은 한국말 또 옆의 전우들까지 합세해 손짓 발짓으로 알아낸 바에 의하면 할머니의 나이는 93살이었고 지난 며칠동안 먼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가족들은 죽거나 흩어졌고 함께 오던 몇몇 친구들과 같은 마을 사람들도 모두 폭격이나 전투상황으로 서로 뿔뿔히 헤어졌다고 한다. 폭파장치로 모두 날아가…납득시키려 몸짓발짓으로 애썼으나 피난 다니는데 너무 지쳐서 그냥 여기 있고 싶다고 했고 또… 그 할머니를 억지로 끌고서라도 배에 태웠어야 했던게 아닌가 통조림을 모닥불에 데우고 있는 사이 항구에 정박해서 피난민과 병력 보급품 탄약 등을 싣고 있던 한 배에서는 스피커를 통해 화이트 크리스마스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지난 1달 반의 그 끔찍한 전투기간은 내가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고 상상치도 못했던 바로 지옥의 시간들이었다. 미국에서 항상 듣던 지상의 평화와 인간의 사랑을 노래한 이 음악이 이 순간에 들으니 아주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통조림이 뜨거워진 다음 할머니에게 드시라고 권했다. 이윽고 배에 오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할머니에게 함께 가자고 몸짓으로 알렸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조금 있으면 폭파장치로 인하여 이 일대가 모두 날아가 버린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려고 동료들과 함께 몸짓 발짓으로 애썼으나 할머니는 이제 피난 다니는데 너무 지쳐서 그냥 여기 있고 싶다고 했고 또 여기 있어야 자식들과 손주들도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역시 손짓 발짓으로 표현했다. 배위에서는 동료들이 빨리 올라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배에 올랐고 곧 상갑판으로 올라가며 뒤돌아 보니 할머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처여한 모습이었으나 그 표정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배나 떠나려고 후진하고 있을때 통조림을 먹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폭발은 배가 바다쪽으로 1Km쯤 나아갔을까 할때 일어났다. 공장의 굴뚝도 부두도 군수품도 전투장비와 포탄도 모든 것이 순식간에 날아 올라가는 처절한 폭발이었다. 연기가 흩어졌을때 남은 거라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드디어 소원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이상 아무데도 그녀가 피난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평안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북한 땅을 벗어나 미국 배위에서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이날 우리는 트루먼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흥남철수를 알리는 방송을 들었다. 배위에서 부산까지의 3일간을 안전하게 보냈고 그 이후부터는 다시 매일매일 전투로 날을 지새웠지만 어쨌든 그날은 내가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감사히 여기며 그리고 그 늙은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는 크리스마스로 내 마음속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내가 그 할머니를 억지로 끌고서라도 배에 태웠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나를 괴롭히고 있다." 〈끝〉 ■심사평, 어휘·문법보다 내용의 공감 여부 살펴 6.25 60주년을 맞아 실시한 이번 수필 공모전에는 총 53편이 응모됐다. 응모자들은 90대에 가까운 노년층에서 초등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중에 4편의 영문 작품도 있었다. 6.25 수필공모전이라서 그랬는지 다른 공모전과는 달리 노년층의 참여도가 높았다. 컴퓨터 시대 답지 않게 육필로 쓴 글 속에는 60년 세월에도 아물지 못한 상처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수필의 주제는 6.25전쟁의 참혹성과 공산집단의 비윤리성으로 고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노년층 응모자의 경우는 실제로 경험한 사실을 글로 표현했고 젊은층에서는 부모나 친척으로부터 들은 6.25의 참상을 기술했다. 작품의 상당수가 북한 공산집단에 대한 울분과 성토 비극적인 전쟁으로 인한 고통 한국전 당시 군에 근무할 때의 경험담 등이었고 일부는 대북관계 한미동맹 천안함 사태 등에 대한 주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번 심사는 본사 논설위원들이 맡아주었는데 6.25 참상에 대한 일반적인 고발은 그동안 많이 알려져 왔던 만큼 이번엔 개인의 경험과 느낌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응모자들이 그들만의 특수한 상황에서 경험한 이산의 고통과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를 어떻게 자신만의 글로 표현했는가를 살폈다. 응모작품 중 상당수는 자신의 경험이 아닌 6.25전쟁에 대한 일반론을 기술한 경우도 많았는데 이들 작품들은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얻지 못했다. 응모자의 상당수가 노년층이었음을 감안하여 심사규정에서 문장력이나 어휘 문법 등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노년층 응모자의 경우 어법이 어색하고 맞춤법 등이 일부 틀렸어도 큰 감점 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글의 내용이 얼마만큼 6.25의 비극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심사위원들에게 공감을 주었는가에 따라 순위를 결정했다. 최우수상 1명을 비롯해 우수상 3명 장려상 3명을 선정했는데 여느 공모전과 마찬가지로 심사위원들의 주관적 판단이 작용되기 때문에 부문별 수상작들의 우열 차이는 크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영문으로 작성한 응모작 중 2편은 자라나는 2세들의 조국관 정체성 등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마지막으로 아쉬웠던 것은 이번 수필공모전의 응모 형식이나 작품의 분량 등에 대한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지 않아 수필 분량을 크게 넘은 작품들이 많았고 논문형식을 취한 작품을 있었다는 점이다. 올해 처음 실시된 6.25 수필공모전은 노년과 어린이 등 세대를 아우르는 응모자들이 참가해 6.25전쟁을 새롭게 조명하고 확실한 국가관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 의미있는 행사였다. 앞으로 한국정부가 재외동포사회에서 이같은 행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해 1세와 2세들이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완신 논설실장

2010-07-20

[최우수상] 내가 들은 6·25 이야기 '고무신'

엄마는 언제나 한복을 입고 계셨다.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 속에서도 엄마는 사시 사철 긴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솜 넣은 버선에 고무신을 신은 모습 뿐이다. 더운 여름날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발 끝까지 내려오는 치마 자락을 손으로 잡아 허리끈으로 질끈 동여 매고 장 바구니를 들고 대문을 나서는 엄마의 뒷모습은 동네 사진관의 흑백 사진처럼 아직도 선명하다. 태어나고 자란 서울의 돈암동이 내 세계의 전부 일때 엄마가 나만 사립초등학교에 보냈다. 당시의 '성신 사대부국'은 근처의 은석과 함께 돈 많고 '빽'좋은 집 아이들이 많았다. 학교 행사나 수업 참관일 때면 학부형들이 오는데 다들 양장에 하이힐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언제나 한복에 고무신을 신은 엄마가 은근히 부끄러웠다.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편인지라 특별히 부모님 뜻을 어긴 적이 없었지만 엄마의 고무신은 싫었다. 엄마는 집에서도 늘 솜버선을 신은 채였다. 엄마의 맨 발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 형제들 넷을 키우고 살림하며 엄마는 늘 명랑하고 분주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이었나보다. 몹시 더웠는데도 목이 따끔거리고 한기가 들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말도 못하고 앉아있는 데 담임 선생님이 조퇴를 명령했다. 뜨거운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어떻게 걸었는 지 모른다. 열린 우리 집대문을 보니 반가와서 울음이 나왔다. 1. 한 여름의 집 안은 찜통처럼 더웠는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아직 학교도 안 들어 간 어린 두 동생도 보이지 않았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벌컥 설움이 복받히려는 데 어디서 가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마루로 조용히 올라갔다. 몇 발자욱을 옮기다 열어 놓은 건넌방에서 엄마의 버선 벗은 두 발을 보았다. 엄마의 두 발은 발가락이 하나도 없이 뭉툭하고 작았다. 발 등과 옆에는 칼자국 같은 흉터가 크게 나 있고 주변은 굳은 살이 허옇게 덮고있었다. 엄마는 대야에 물을 떠다 발을 담가 불려서 면도칼로 굳은 살을 깍아 내고 있었다. 그 일에 집중하느라 엄마는 내 기척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알아차렸다. 나에게 엄마의 처참한 두 발은 무섭고 충격이었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입술만 앙 물고있었나보다. 엄마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일 주일쯤 여름 몸살을 심하게 알았고 그 날 이후로 다시는 엄마 발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다. 엄마는 발가락이 다 잘려나가 작아진 발을 버선 앞 뒤로 솜을 뭉쳐 넣어 적당한 크기로 만들고 거기에 맞춰서 고무신을 신고 다닌 것이다. 대중 목욕탕에 목욕하러 갈 때 왜 항상 외할머니나 이모하고 같이 갔는 지도 알 것 같았다. 열 살짜리 마음에도 엄마의 발은 건드려서는 안될 상처이고 끔찍한 비극의 잔재로 남게되었다. 2. 육이오 사변이 터진 1950년 엄마는 여고를 막 졸업한 꿈 많은 열 아홉이었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독립적인 칠남매의 맏이라 아래로 동생들을 돌보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려는 소원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전남 고창에서 부유했던 외가는 주변에 친척들도 많아 유복한 일가를 이루었고 인심이 후하고 부지런한 외할머니는 어려운 이웃들을 늘 챙기고 도우셨다. 그러나 전쟁은 평화롭던 마을을 지옥으로 바꾸었다. 순하고 착한 마을 사람들은 인민군이 들어오자 그들의 꼭둑각시가 되어 가진 자들을 반동으로 몰아세웠다. 외가의 재산은 다 빼았겼고 가까운 친척들이 인민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처단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집안의 소작농 아저씨의 도움으로 그 집에 몸을 숨겼다. 대신 가장이 없어진 후 외할머니와 남은 식구들은 끔찍한 댓가를 치루어야했다. 장녀로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지켜내느라 겨우 스물 안팎의 엄마가 당했을 고난은 상상할 수도 없다. 엄마의 여섯 동생들 중에서 가장 엄마를 따르고 총명했던 바로 밑의 남동생이 장남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대신해 죽창에 찔려 잔인하게 죽어갔다. 엄마는 혼절한 외할머니 대신 사랑하는 동생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피눈물을 흘리며 지켜보고 나중에 시신까지 수습해서 뒷 산에 묻었다. "마치 온 세상이 피에 굶주린 아귀들로 가득 한 것 같았지. 죽창을 제일 먼저 찌른 놈이 나랑 젖을 같이 먹고 자란 유모의 아들이더라. 내 쌍둥이 형제 같은 그 놈이었어." 내가 고등학교때 엄마는 그 시절의 얘기를 처음으로 들려주었다. 3. 나는 그 때까지도 엄마네 형제들(외삼촌과 이모들)이 모두 일곱인 줄로 알고있었다.엄마에게는 가슴에 묻은 채 죽어도 잊지 못하는 생각만 해도 심장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아픔인 또 한명의 동생이 있었던거다. 국군이 마을을 접수하고 또 한 바탕의 피비린내 나는 보복이 시작되었다. 인민군때 붉은 완장차고 압잡이노릇을 했던 자들이 이 번에는 거꾸로 숙청 대상이었다. 형제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선량한 마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죽이는 피비린내의 연속…. 몹시 추운 겨울에 엄마네 식구들은 피난 길에 올랐다. 가재도구도 겨우 챙겼지만 혹한에 어린 동생들 돌보느라 엄마는 몹시 힘들었다. 특히나 늦게 태어난 막내가 아픈 바람에 외할머니는 막내에게 묶여있고 나머지 다섯 동생들은 고스란히 엄마 책임이었다. 엄마는 장녀로서의 책임감과 유난히 잘 참는 성격때문에 자기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몰랐다. 피난 중에 엄마의 두 발이 동상에 걸렸다. 검푸르게 변한 두 발은 감각이 없고 걸을 수가 없었다. 스무 살의엄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창을 제일 먼저 찌른 놈이…유모의 아들이더라." 잘려나간 발가락과 함께 꿈과 미래를 접고 생업전선에… 엄마대신 태어났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올수 있었을까 국군의 한 젊은 군의관이 피난민 대열에서 낙오한 엄마를 발견해 이동중인 천막 병동으로 옮겨 수술을 했다. 다행히 발의 본체는 건졌지만 열 개의 발가락은 다 잘려나갔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엄마는 잘려나간 발가락과 함께 꿈과 여자로서의 미래를 접고 솜넣은 버선에 고무신으로 무장을 하고 남은 식구들을 위해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읍내에 미장원을 개업해서 열심히 파마를 말고 고데기를 돌렸다. 밑의 여동생을 시집보내고 남동생들을 공부시키고 작은 집도 부모님께 사 드렸다. 스물 아홉에 우리 아버지를 만났는 데 아버지가 청혼을 하자 자기는 발 병신이라 결혼을 할수없다고 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포기하지 않자 신고 있던 버선을 벗어 흉칙스런 발을 보여주었다. 서른 넷 노총각이던 아버지는 두 손으로 엄마의 발을 감싸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당신의 두 발이 되어 주겠소." 4. 엄마는 최근까지도 주로 한복을 입으셨다. 올해 여든 이신 엄마는 60년을 솜버선과 고무신을 신고 사신다. 평생 대중 목욕탕을 못 가신 엄마를 위해 작년에 한국에 나가면서 수중용 고무 덧신을 사갔다. 미국 할머니들이 물 속 운동을 하면서 신는 모습을 보고 힌트를 얻었는데 엄마를 꼬셔 찜질방에 모시고 갔다. 처음에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주저하는 모습이었는데 탕 속에 몸을 담그고는 아주 좋아하셨다.푸른 고무 덧신을 신은 엄마의 발은 초등학생처럼 작아서 나이 든 할머니의 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작은 두 발이 애처로워 눈물이 났다. 5년 전 아버지를 먼저 보내신 후 엄마는 말 수도 적어지고 외출도 잘 안해서 함께 사는 동생을 걱정시키신다. 해 마다 6월이 되어 달력에서 25란 숫자를 보면 엄마가 온 몸으로 치뤄 낸 전쟁을 생각하고는 했다. 내가 그 시대에 엄마 대신 태어났다면 온전한 몸과 정신으로 지금까지 살아 올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다. 엄마가 마치 나를 대신해 그 끔찍하고 징글징글한 전쟁을 몸 던져 받아낸 것 같다. 나는 조국 민주주의 숭고한 희생 혈맹 같은 거창하고 사전적인 단어보다 열 아홉의 우리들의 딸보다 더 어리고 순진했던 내 엄마가 겪은 전쟁이 더 처절하고 무섭다. 내가 사는 동안은 들은 얘기라도 기억하겠지만 엄마 세대들이 떠나고 우리마저 가고 나면 우리 아이들이 과연 이 전쟁을 알기나 할까. 나에게 엄마의고무신은 육이오의 비극과 영원히 아물지 않고 벌어져서 건드릴 때마다 아픈 생살의 찢김이다. 〈끝〉 ■대회개요, 53편 응모작 중 7개 작품 선정해 중앙일보ㆍ중앙방송이 6ㆍ25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마련한 이번 수필 공모전은 잊혀지고 있는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의 현실을 되새기고 2세들에게 역사로 이어가는데 기여하기 위함이었다. 지난 6월 1일부터 18일까지 응모기간 중 총 53명이 응모했으며 본사 논설위원들의 엄정한 심사를 거쳐 최우수상 우수상 장려상 등 모두 7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최우수상은 어머니의 19세 때 얘기를 진솔하게 쓴 김성민씨(50ㆍ시카고 거주)의 '내가 들은 6ㆍ25이야기- 고무신'이 선정됐고 우수상은 김태성씨의 'The Memories in Youngsan'과 신금석씨의 '내가 겪은 6ㆍ25전쟁과 천안함' 김명순 씨의 '저 멀리 있는 고향'이 뽑혔다. 또 장려상은 '할머니 그리고 한 미군병사'를 쓴 나영욱씨 'The importance of the Alliance between South Korea & USA'를 쓴 송해수씨 '아 그날이여!'의 김일홍 씨가 각각 영예를 차지했다. 이번 공모전에 당선된 수필 작품중 3편을 지면에 소개한다. 게재되지 못한 다른 작품은 미주중앙일보 인터넷 신문인 코리아데일리닷컴(koreadaily.com)에서 읽을 수 있다.

2010-07-20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